정크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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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를 읽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기억 한 곳에 그 소설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정크>란 소설로 다시 작가를 만났다. 정크. 사전을 찾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쓰레기다. 소설 속 주인공 성재가 가끔 내뱉는 단어다. 쓰레기. 나도 가끔 이 단어를 누군가로 향해 내뱉는다. 그 때 그 단어는 나의 분노를 그 대상에게 쏟아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럼 성재에게 이 단어는 무엇일까? 자신을 한없이 낮출 수밖에 없는 그이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때문일까?

 

성재는 어머니와 같은 성을 쓴다. 아버지가 없냐고? 있다. 소설 첫 문장이 “성재는?”이라고 묻는 아버지의 말이다. 이유는 첩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와서 돈을 놓아두고 가는 것 정도의 거리만 남은 아버지다. 아버지의 성을 쓸 수 없기에 엄마의 성을 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성이 없다. 민수 형, 주아, 은주 등이 모두 이름으로 불린다. 아버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성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이것은 아버지가 와서 성재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는 것과 또 연결된다. 이 부자의 일상은 이렇게 서로 어긋난다. 이것은 또 엄마와 성재의 엇갈림으로 나타난다. 서로 마주하기를 싫어해서 아르바이트 시간을 조정하는 그의 일상이 바로 그 증거다.

 

두 번째 장 첫 문장은 “민수 형은, 결혼한 사람이었다.”(15쪽)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그 의미를 몰랐다. 성재는 게이다. 그의 어린 시절 회상 한 자락으로 모든 것을 짐작하기에는 조금 부족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그에게 민수 형은 애인이었다. 미국 유학 떠나면서 헤어졌다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났다. 그는 유학 시절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 양성애자인 것일까? 민수 형에게도 성재는 애증의 대상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고 있고 가장 안정적인 섹스의 대상이다. 하지만 결혼한 민수 형은 다시 엇갈리는 아버지와 같은 관계로 변한다.

 

홀어머니에 게이인 성재는 이 사회에서 가장 소수 지위를 가졌다. 학벌도 좋지 않다. 아르바이트로 생활하지만 경제적 안정감이 없다. 흔히 미국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돈 잘 버는 게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어릴 때 엄마의 화장대에서 그를 매혹시켰던 화장 등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란 직업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경력도 거의 없고 나이도 적지 않고 거기에 흔하지 않은 남성이다. 뭐 요즘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많아졌다고 하지만 아직은 소수다. 이런 조건과 환경은 그에게서 삶의 의지를 빼앗는다.

 

3개월에 한 번 보건소에서 익명으로 에이즈 검사를 받는다. 이 장면에서 그의 속내가 드러난다. “내가 도망치고 싶고, 달아나고 싶은 그것은 죽음도, 에이즈도, 사람들의 시선도 아니었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고 또 무서워했던 것, 그것은 바로 삶이었다. 죽도록 도망치고 싶지만 죽어도 도망쳐지지 않는 이 현실, 내가 서 있는 이곳, 나, 라는 인간, 나, 라는 인간의 더럽고 구질구질한 한 생애가 두렵고 무서워 이가 덜덜 떨렸다. (중략)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었고, 당장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은 순간만 자꾸 이어졌는데 그런데, 그런데, 나는 또 자꾸만 살고 있었다. 살아 있었고, 살아가고 있었다.”(175쪽)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삶은 계속된다. 욕망에 몸을 맡겨 섹스를 나누지만 단순한 배출이다. 그가 바라는 사람은 민수 형이다. 하지만 한 여자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는 자신의 삶의 벽을 쌓아간다. 벽은 결코 낮지 않다. 감정은 쉽게 제어되지 않고 관계는 파국으로 이어진다. 이 파국의 끝에서 그는 다시 생존의 힘을 발견한다. 아버지를 인정한다. 이 부분은 성장 소설로 봐도 될 것 같다. 민수 형과의 애증은 연애소설이고, 그가 흡입하고 마시는 마약은 또 다른 삶의 공간이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의 고뇌와 자기비하와 현실의 높은 벽이 가장 소수자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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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6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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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작품 <고백> 이후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늘 만족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다. 단순하게 말하면 예상했던 범인과 결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인자의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배척당하고 자기 부모 얼굴도 모르는데 부모의 죄를 사죄해야 한다는 설정 때문이다. 문화와 정서 차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많지 않은 분량에 늘 그렇듯이 빠르게 쉽게 잘 읽히는 것은 변함없다.

 

소설의 구성은 간단하다. 료코와 하루미의 독백이 교차하면서 진행한다. 각자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다보니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느낌도 있다. 개인적으로 바라지 않던 결말을 예상했는데 그대로 되었다. 이렇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닫힌 재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반전을 예상했는데 그 반전이 예상한 대로라면 누구나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가질 것이다. 여기에 많지 않은 분량이 두 여인의 감정을 충분히 녹여내기에 부족하다. 감정의 사슬이 너무 비약한 것 같다.

 

하루미는 고아다. 고아원에서 자랐다. 료코도 고아다. 료코는 어릴 때 입양되었다. 둘은 시작은 비슷했지만 자란 환경은 다르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 공통성은 둘을 하나로 이어준다. 그들은 또 하나의 가족이 된다. 여기에 파란 리본은 이 둘을 묶어 놓고 가족임을 알려주는 매개가 된다. 어릴 때부터 그림책에 소질이 있던 료코가 하루미의 이야기를 각색해 그림책으로 낸 것은 하루미의 엄마가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료코도 그것을 바랐다. 처음 이 부분을 읽을 때 이 둘의 갈등이 중심 내용인 줄 알았다. 하지만 료코는 이 그림책에 공동 저자를 제안할 정도로 욕심이 없다. 혹시 하루미의 성격을 알고 그런 척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런 생각은 사라졌다.

 

그림책과 두 여인의 비슷하지만 다른 처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고개를 끄덕인다. 공감대가 형성된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요코의 아들 유타가 납치되면서부터다. 범인이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다. 진실이다. 진실을 밝히길 원하는데 단서가 부족하다. 혹시 얼마 전 문제가 되었던 요코 남편 마사키의 부정헌금 문제일까? 너무 쉽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에 대한 사실이 밝혀지지만 납치범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단서가 팩스로 온다. 모미노키 마을 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은 35년 전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시댁의 문제일까? 이 단서가 왔을 때 시댁과 남편 사무실 분위기는 자신들과 상관없다는 반응이다.

 

읽으면서 분노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 중 하나가 자신들과 상관없는 단서를 고아원 출신 며느리에게 전가하는 부분이다.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 사건은 요코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다. 여기서 살인자의 피와 가족이란 굴레를 씌우는데 현재 우리도 그런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왜 유타를 납치해서 요코의 진실을 강요하는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긴 시간이 흐른 후 당사자들이 죽고 병들고 그 흔적만 겨우 남은 상태에서 말이다. 복수의 감정이 남았다고 하지만 그 대상은 이미 사라졌다. 그 후손에게 복수를 이어가는 것이 예전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이 소설의 흐름 속에서는 왠지 어색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빠른 전개가 이어지다 보니 감정의 흐름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 자신이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다. 세상의 일이 모두 나의 이해 범주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전개도 가능하다. 어쩌면 더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을 위해서라면 감정을 좀더 강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요코의 감정 흐름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지만 언제나처럼 이번 작품도 우리에게 큰 물음을 던진다. 복수다. 가족이다. 작가가 형식의 틀을 깨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낸다면 어떨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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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리어 - 뼈와 돌의 전쟁 본 트릴로지 Bone Trilogy 1
피아더르 오 길린 지음, 이원경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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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트릴로지 첫 권이다. 기괴한 설정과 전개는 처음 소개글을 읽었을 때보다 더 하다. 끝까지 읽을 때조차 이 소설 속 세계에 대해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단서라면 역자가 소설 속 설정으로 사용된 단어를 해석해줄 때 조금 알 수 있게 되었다. 쉽지 않은 설정이다. 아마도 마지막 3부를 읽게 되면 좀더 쉽게 이해되겠지만 아직은 숨겨진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 소설을 광고하는 문구 중 “어제 어머니를 짐승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오늘은 내 아들을 먹었다.”란 글보다 더 강렬한 것은 없을 것이다. 실제 이 소설 속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처음 몇 쪽을 읽었을 때 원시 세계가 설정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종족들이 나오고 이들과 전투가 벌어지고 고기를 얻기 위해 다른 생명체를 죽이거나 인간들 중 효용성이 떨어진 사람들을 다른 짐승들과 교환할 때 이 판타지가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이 잔인함은 생존을 위해서다. 인정한다. 생존을 위해서 사냥하고 사냥당하는 그들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풀려갈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 심해졌다. 마지막에 가서야 단서 중 하나가 흘러나왔지만 말이다.

 

주인공 스톱마우스는 말을 더듬어서 생긴 이름이다. 그의 형 월브레이커는 종족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형제는 사냥 나갔다가 아머백이란 종족에게 쫓긴다. 용감한 형은 공포에 질린다. 이 형을 구한 것은 동생이다. 하지만 형은 동생이 위기에 처했음에도 혼자서 도망간다.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다. 죽기 바로 직전에 거대하고 눈부신 물체가 떨어지면서 생긴 현상 때문에 스톱마우스는 도망친다. 이 사건은 두 형제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다. 누구보다 용감하고 능력있다고 알려진 형이 비겁한 도망자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는 그이기에 둘의 틈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한다.

 

몇 개의 종족들이 뭉쳐서 살고 있고 다른 종족을 죽여 그 고기로 삶을 유지한다. 어떻게 보면 인육을 먹는다고도 할 수 있다. 육식이 생존의 기본인 세상에 농사란 존재할 수 없다. 조금만 방심하면 다른 종족이 그들을 사냥한다. 고기가 부족하면 자기 종족을 먹기보다는 다른 종족과 서로 교환해서 먹는다. 이 장면을 보면서 복날에 자기 집에서 기르던 개를 다른 집 개와 바꿔서 먹는다고 누군가가 말한 것이 떠올랐다. 이 설정은 뒤로 가면 하나의 갈등 요소가 된다. 생존을 위해 고기를 먹어야만 하는 인류에게 힘없고 병든 존재는 교환가치로만 남기 때문이다.

 

이 기괴한 세계에 새로운 인간이 등장한다. 인드라니다. 그녀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즉 비행체가 추락한 것이다. 그녀의 존재는 이 세계에서 이질적이다. 무술을 보여주고 스톱마우스 등과 다른 피부를 가졌기 때문이다. 스톱마우스는 그녀에게 끌린다. 하지만 그녀는 사냥에서 능력을 보여준 형의 둘째 부인이 된다. 비겁한 형이 머리를 사용해서 고기를 구해왔기 때문이다. 이 사냥에서 스톱마우스가 능력을 발휘했지만 순진한 그이기에 전혀 이것을 대비하지 못했다. 또 그는 형의 비겁한 과거를 알고 있다. 한 여자를 둘러싼 형제의 대립은 영원한 소재다.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스톱마우스가 종족 속에서 함께 사냥하는 것과 병에 걸린 인드라니를 데리고 종족을 떠나 여행을 가는 것이다. 이 여행은 결코 쉽지 않다. 썰매에 식량을 실어서 움직여야 하는데 그녀는 병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다. 그리고 누구도 그들이 살던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녀가 가야만 한다고 한 장소는 분명 이 소설 속 세계의 핵심일 텐데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조금 단서를 흘리는데 과연 이 3부작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문명과 원시의 충돌이란 단순한 설정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잔혹하고 지극히 본능적이면서 투쟁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담긴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이 설정이 다른 의미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스톱마우스의 대활약은 영웅적이라기보다 처절하다. 그의 성장이 조금씩 드러나지만 과연 어떤 식으로 이 세계의 실체를 밝힐지는 알 수 없다. 최첨단 기술과 폭력이 난무하는 판타지가 결합했다.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더 잔혹할 수 있다. 이 3부작의 마지막 권을 읽고 나면 과연 현재 우리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지 않을까 섣부른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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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다리 1
줄리 오린저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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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쪽이 넘는 소설이다. 워낙 호평을 받은 책이라 감히 도전했다. 1주일이 꼬박 걸렸다. 어려운 책이 아닌데도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충실히 읽을 시간이 부족한 것도 하나의 이유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알기에 무작정 달려갈 수 없었다. 그 유명한 홀로코스트가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두 주인공 언드러시와 클러러는 조금 경우가 다르다. 낯선 유럽 역사 속에서 조금 다른 유럽을 본 것이다. 그들의 비극이 다른 곳의 비극보다 아주 조금 적다고 해도 말이다.

 

현대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말할 때 팔레스타인을 그냥 지나갈 수 없다. 20세기 초반 그들이 겪은 엄청난 비극이 다시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개인은 선량하고 착하지만 이들을 모은 집단이 나쁘다는 말처럼, 아니 쉽게 한국의 예비군들은 군복만 입혀놓으면 개가 된다는 말처럼 나치의 광풍은 거대하고 참혹하다. 이 소설 속에서 헝가리 군대의 모습 중 일부가 그렇다. 현대 중동은 수많은 비극을 품고 있다. 홀로코스트 산업이란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의 홍보 때문인지 팔레스타인의 수난을 다룬 문학이나 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적들에게 배운 것일까? 단순히 소설에만 집중하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또 나왔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 언드러시는 잡지 표지를 잘 그린 것 때문에 파리 건축학교 장학생이 된다. 이 장학금은 헝가리 유대단체가 지원하는 것이다. 아직 유럽에 전쟁의 기운이 발현하기 전이기에 그에게 이 기회는 도저히 놓칠 수 없는 행운이다. 환전을 위해 간 은행에서 부딪힌 하스 부인이 그가 파리에 간다는 것을 알고 조그만 부탁을 한다. 아들 요제프에게 뭔가를 전해달라는 것이다. 며칠 동안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거리를 생각하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여기에 한 노부인이 파리에서 편지를 부쳐달라고 요청한다. 이 조그만 인연이 나중에는 아주 중요한 인연임이 밝혀진다.

 

낯선 파리. 아름다운 파리다. 하지만 불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방도 구하지 못한 그에게 너무나도 낯설다. 어렵게 방을 구하고 학교에 간다. 그가 바라는 건축가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유대인 친구들을 만난다. 자신들의 모임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 이 장면들을 보면서 살짝 반감이 생겼다. 유대인들이 너무 폐쇄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들이 미국에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만들어 생활하는 것을 떠올리니 너무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것을 비판하고 욕한다면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친구와 선생과 학교가 갖추어졌다고 삶이 행복하지는 않다.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돈이다. 그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한 헝가리 유대인단체가 정부의 헝가리 유대인 해외 송금 금지로 장학금을 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좋은 선생과 친구는 다른 방법을 찾아준다. 거기에 언드러시의 노력이 보태져야 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언드러시는 기차에서 만난 유대인 노버크의 도움으로 나머지 돈을 벌게 된다. 이 직장은 그에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클러러다. 그녀는 가슴 아프고 참혹한 과거를 지닌 채 딸 엘리자베스와 살고 있다. 그녀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 이 둘의 강한 사랑이 시작한다.

 

두 권으로 나누어진 이 소설에서 1권은 언더러시의 파리 생활을, 2권은 헝가리로 돌아간 후 겪게 되는 2차 대전 당시 헝가리 유대인의 삶과 비극을 보여준다. 1권에서 사랑을 시작하는 한 청춘의 고뇌와 열정이 다루어진다면 2권은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대인의 비극이 이어진다. 다행이라면 헝가리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덜 고생했다는 정도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작가가 비극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랑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나의 감성이 메말랐거나 좀더 강한 자극받기를 바란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그들이 선택한 길이다. 역사의 비극을 아는 상태에서 분명하게 비극이 보이는데 그들은 사랑 때문에 가족 때문에 그곳에 머문다. 그들에게 닥쳐올 비극을 생각하면 정말 답답하다. 물론 달아난다고 그 시도가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참혹함과 나치의 잔혹함을 아는 나에게 이것은 강한 불안감을 전해준다. 혹시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하고. 이 긴장감과 불안감이 재미있게 읽힐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다. 헝가리 유대인이란 특성 때문에 더 그렇다.

 

비극을 알지만 다른 결말이 나오길 기대하면서 읽었다. 그 기대는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준 비극을 모두 벗어날 수는 없다. 비록 헝가리 유대인이 폴란드나 독일 유대인에 비해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게 되면서 벌어지는 몇 가지 사건 중 하나는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다. 엄청나게 참혹한 비극이 있는 와중에도 인간을 지키려고 노력한 헝가리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는 늘 시대의 앞잡이나 동조자가 있다. 이 때문에 생기는 비극은 또 다른 아픔이자 기억이다.

 

정말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언드러시와 친구 멘델이 노무부대 안에서 신문을 만든 것이다. 이런 여유가 어쩌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하고 말이다. 이것도 역시 결과를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불편함이다. 이런 홀로코스트 관련 문학은 늘 이런 불편함과 불안감을 가지고 읽을 수밖에 없다. 역사를 바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려준다. 가볍게 시작할 수 없는 분량에 내용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고증을 통한 묘사와 서술은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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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의 나비
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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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어릿광대의 나비>와 <마쓰노에의 기록> 두 편이 실린 단편집이다. 달랑 두 편인데 단편집이라고 말하니 조금 어색하다. 분량도 많지 않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다. 적은 분량 때문에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 완전히 소화하지도 읽지도 못했다. 그것은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이자 어려움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소설에 상을 준 심사위원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런 소설 정말 오랜만이다.

 

<어릿광대의 나비>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쉽지 않다. 화자가 바뀌는 것이야 쉽게 파악되지만 이 변화가 이야기 속에 녹아갈 때 만들어지는 시간과 설명은 쉽지 않다. 희대의 다언어 작가 도모유키 도모유키를 둘러싼 상황들이 녹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쓴 소설에서 시작하여 이 소설을 번역한 사람이 등장하고 다시 도모유키가 등장하는 설정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단순히 사람의 변화만이 아니라 상황과 시간의 전복 등이 이어지면서 복잡해진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이 있다. 그것은 도모유키 도모유키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방식이다. 혹시 나도 이런 식으로 한다면 빨리 다른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마쓰노에의 기록>은 원작을 번역한 작품을 다시 번역하고, 이 번역을 다시 번역하는 것을 다룬다. 이런 번역 과정 속에 원래 의미는 사라지고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 어쩌면 번역이라기보다 상상력에 의한 창작이 더 맞을 것 같다. 다른 언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두 번역자가 만난 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사람속이 얻은 최초의 언어는 노래였다.”(188쪽)란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아직은 과학적으로 완전히 해석되지 못한 뇌의 신비도 다루어지는데 역시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가끔 이와 비슷한 소설을 읽는다. 읽을 때면 늘 고민에 빠진다. 쉽지 않다. 익숙한 문장과 구성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분량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바로 이런 낯설음 때문이다. 추적자와 추적자를 관찰하는 대상의 이야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런 구성으로 이어지고 이 구성 밖에서 만들어지는 설정과 환경이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다시 번역자와 원작자의 상호 번역이 이해가 아닌 자신의 인식에만 머문 것에 눈길이 가게 한다. 모든 번역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면 지나친 과장이 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낯선 문장과 전개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소개가 보여준 해설의 깊이나 넓이에 대해 그 반만이라도 이해했다면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호감은 더 높아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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