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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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칼릴 지브란의 책들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이 책도 그때 읽었을 것이다. 문고판으로 나왔던 그 당시 책들은 사실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내용이 아니고, 감성적으로 파고들지도 못했다. 이런 기억만을 가지고 있던 중에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 낯익지만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류시화의 번역이다. 집에 이 시인의 책이 몇 권이나 있지만 늘 묵혀두고만 있다.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보다 젊었던 당시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정말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처음 접하는 류시화의 번역이란 점이 다시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스물여섯 가지 삶에 대한 주제를 시적 언어로 썼다고 한다. 이전까지 이 책을 시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도 읽으면서 시라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떠오르는 이야기 방식이다. 물론 훨씬 간결하고 읽기 쉽다. 이런 생각들 사이로 칼릴 지브란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는 어떤 부분에서는 크게 공감을 하고, 어떤 부분은 이해하지 못함의 영역에 머물고, 또 어딘가는 내 이성의 쓸데없는 구별로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다. 아마도 먼 훗날 다시 한 번 더 읽고 새로운 감상을 얻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지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낯설지 않다. 다른 책에서 이미 본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이 출간된 지도 거의 백 년이 다 되어가는 현실과 이 책을 읽었던 수많은 작가들을 감안하면 이해가 충분히 된다. 여기에 시인에게 영향을 줬던 책들을 더하면 완전히 새로운 글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모으고 자신의 생각을 더해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표현한다는 것은 다른 영역이다. 내가 읽으면서 감탄했고, 다시 기억을 되살렸던 대부분은 차분하게 읊조리는 시인의 목소리와 이성과 감정과 선과 악에 대하여 풀어낸 이야기들이다.

 

예언자 알무스타파가 오르팰리스 성에서 살다가 떠나는 순간에 그 성에 사는 사람들이 던진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다. 배를 타고 떠난다는 설정을 죽음으로 해석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동의한다. 사랑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고 작별을 말하는 알무스타파의 이야기는 한 편의 잠언집에 더 가깝다. 신비주의가 강하게 드러나는 문구들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계속해서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놓치는 것도 많고, 말의 혼란 속에 헤맨다. 나 자신 또한 이런 순간이 적지 않았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서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보다는 ‘나는 한 가지 진리를 발견했다.’라고 말하라.”는 문구는 이런 경우에 딱 맞다. 이성과 감정을 바다 위를 향해하는 배에 비유한 것이나 선과 악의 구별을 다르게 풀어낸 부분은 조용히 읊조리면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이 책은 부분과 전체를 구분하기보다 하나의 것으로 다루면서 조용히 나눈다. 개인적으로 고통에 관해서 풀어낸 부분은 나의 이해와 충동했다. 현실 너머를 말하는 이런 글을 볼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감이다.

 

칼릴 지브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두 개의 글이 있다. 하나는 번역자 류시화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조지 키랄라의 글이다. 조지 키랄라의 글은 칼릴 지브란의 삶을 신비화하고 과장한다. 현실에 덧칠했는데 이 부분을 지우는 역할을 역자가 한다. 몇 가지 분명하지 않은 에피소드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평가가 거의 없는 시인에 대한 아쉬움을 내뱉는다. 그리고 한 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말한다. 조지 키랄라의 글과 달리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시인의 삶과 비교하면 글과 현실의 차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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