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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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플랜’인줄 알았다. 노안과 상식에 기댄 첫인상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포틀랜드를 작가가 줄여서 만든 조어다. 나에게 포틀랜드라고 하면 미국 스포츠 구단의 이름에 들어간 것 외에는 아무 지식도 없다. 당연히 위치가 어딘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오다가다 들은 정보가 있을지 모르지만 딱 그때뿐인 지식이다. 이런 포틀랜드가 이우일의 글과 그림을 통해 나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외국의 한 도시에 무려 2년을 살면서 기록한 책으로. 언제나 외국의 한 도시에서 한 달 이상 살고 싶어하는 나이기에 이 유혹은 아주 강했다.

 

포틀랜드는 미국 오리건주 북서부에 있는 도시다. 이렇게 적으니 내가 오리건주 위치를 아는 것 같다. 사실은 모른다. 지도를 찾아보고 더 쉽게 설명한다면 시애틀 바로 밑에 있는 도시 정도다. 태평양을 끼고 있는 도시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날씨가 시애틀과 아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위치가 비슷한 탓일 것이다. 이곳을 작가는 아내와 딸 은서를 데리고 갔다. 우연히 선택한 도시인데 만족도가 아주 높다. 긴 시간을 머문 탓인지 글과 그림에 여유가 느껴진다. 보통 유명 만화가하면 빡빡한 일정에 쫓길 것 같은데 연재물이 없는 탓인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퐅랜의 생활과 딱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이우일. 이름은 낯익지만 사실 먼 작품을 그렸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 유명한 로빈손 시리즈의 작가다. 가끔 이름을 헷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가도 그 중 한 명이다. 다시 그럴지 모르지만 최소한 올해까지는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으니까 특히!) 만화가의 에세이라고 하지만 그림보다 글이 훨씬 많다. 이 점은 조금 아쉽다. 보통 더 많은 정보를 얻길 원하는데 원근법을 적용한 그림 한 장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다음부터 더 많은 그림을 보고 싶었다. 단순하게 휙 그린 듯한 그림이 아주 세밀하고 정교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진을 대신한 그림들은 사물의 특징을 잘 표현해주었는데 사진과 비교해보고 싶은 느낌도 들었다.

 

외국에 살아본 적이 없다보니 그가 풀어내는 일상의 모습이 낯설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일상과 닮았지만 외적 요인들이 세부적인 차이를 만든다. 퐅랜의 다양한 행사와 축제들은 그런 축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이방인으로 잠시 머물다 간다고 해도 멋진 경험이 될 것 같다. 특히 맥주와 재즈 페스티벌은 오래 머문다면 천천히 여유를 즐기면서 누리고 싶다. 아쉬운 점이라면 맛집을 그렇게 찾아다니지 않아 풍부한 정보가 없다는 것 정도랄까. 대신 그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몇몇은 읽으면서 내 방 모습이 떠올라 괜히 아내의 눈빛이 스쳐지나갔다.

 

퐅랜에서 그는 수집을 계속한다. 이 느낌, 나도 안다. 멈출 수 없다. 파월 북스에서 딸의 첫 번째 책을 만들어준 이야기는 아주 환상적이다. 에스프레소 북 머신이란 것도 처음 알았다. 헌책과 새책이 공존하는 책방 이야기는 나를 유혹한다. 실제 책을 사는 경우는 이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늘 쌓여 있는 책들 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면 한두 시간은 그냥 지나간다. 대형 중고 가게 이야기도 자주 나오는데 우리와 다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이것을 즐긴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사인을 받으려는 그의 열정은 최근 특정 작가에 대한 열정을 잃어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날씨를 빼면 많은 부분이 날아간다. 비가 와도 맞고 다닌다고 했을 때 얼마 전 다녀온 여행지에서 내린 비가 떠올랐다. 조금 내린 비는 그냥 맞고 다녔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공원도 놀랍지만 많은 사람들이 타투를 했다는 부분은 더 놀랍다. 아무리 타투가 자유로운 나라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이 심한 도시라고 하지만 그들이 경험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는 다행이라고 느꼈고, 미국 사는 후배가 한 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아직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그 말. 그리고 아직 잘 살고 있다는 현실. 이렇게 퐅랜의 이미지 하나가 추가된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수집과 책과 잡동사니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자동통역기. 특히 자동통역기는 나도 가까운 미래에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알파고라면 가능할 것이란 기대를 안고. 한 도시에 살면서 생기는 다양한 경험을 이 가족은 한 듯하다. 트럼프 당선의 비극도 보았다. 읽으면서 작가가 매일 달린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작가는 역시 하루키다. 다음으로 박연수다. 이제 이우일도 기억해야 하나? 아직 모르겠다. 그가 퐅랜에서 누린 시간들은 보통 사람들의 부러움을 불러온다. 제목을 패러디하면 그가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나는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 현실이다. 하지만 언제 이 현실을 벗어나 작가처럼, 아니 그보다 적은 날짜라도 낯선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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