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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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작가다. 그렇다고 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유레루>라는 영화가 나온 것을 알고 있고, 이 영화 시나리오를 소설로 각색한 것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작품도 영화 포스트를 먼저 보았다. 표지를 보았을 때 나의 눈에 먼저 들어온 배우는 후카츠 에리다. 한때 아주 즐겨보았던 일본 드라마의 여주인공이었던 그녀였기에 눈에 확 띈 것이다. 사치오 역의 배우는 검색해서 큰 화면으로 보니 생각한 배우와 다른 인물이다. 물론 안면 있는 배우다. 최근 몇 년 일본 드라마를 보지 않았고, 영화도 잘 보지 않아 낯선 배우들이 많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책을 펼쳐 읽고 난 후 이런 생각들은 사라졌다.

 

차량 사고로 아내를 잃은 유명 소설가 이야기다. 이렇게 간단히 적고 나니 별로 쓸 말이 없다. 아내를 지독히 사랑했다면 그 상실감을 절절하게 풀어내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내가 사고로 죽던 밤에 애인과 집에서 섹스를 나누고 있었다. 사고 처리 과정에서도 그는 결코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만 인식하지 그 이상의 뭔가를 느끼지 못한다. 유명 소설가에 뛰어난 외모를 가진 탓에 방송에 자주 출연했다. 아내가 죽었는데도 방송에 출연할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남자의 감정이 변한다. 낯설고 불안하다. 하지만 그 섬세한 묘사와 진행 때문에 강하게 몰입한다.

 

‘나’의 본명은 가누가사 사치오다. 이 이름은 실제 히로시마 카프의 유명 선수와 같다. 아버지가 이 이름을 지을 때 그 선수가 유명했던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자라면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야구를 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 글을 쓰겠다고 했지만 잡지사의 편집부 중 한 명일뿐이었다. 이런 그에게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사람이 대학 신입생 동기였다가 자퇴한 후 미용사가 된 나쓰코다. 그녀의 오랜 지원 끝에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사치오라는 이름을 싫어해 필명을 쓰무라 케이라 지었다. 대외적으로 본명은 한 번도 알린 적이 없다. 그녀는 그를 늘 사치오라고 부른다.

 

나쓰코는 사치오의 글을 좋아한다. 좋은 점만 칭찬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그녀는 일 년에 한 번 친구 유코와 여행을 간다. 여행 가는 도중에 사고로 죽었다. 소설의 전반부는 사치오와 나쓰코의 이야기지만 중반부터는 사치오와 유코의 가족 이야기다. 아내가 죽었을 때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남자가 유코의 남편인 요이치의 연락을 받고 만나면서 생활과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겪는다. 요이치의 아들과 딸의 관심을 끌려고 하고, 어느 순간 그 집에 조금씩 동화된다. 이 과정이 왠지 불안하다. 그가 살아온 순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지속적으로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매니저의 독백은 아주 날카롭고 현실적이다.

 

이 소설은 모두 ‘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나’는 사치오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요이치도, 나쓰코도, 그의 정부도 모두 포함된다. 이 일인칭 시점은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사치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시선은 현실의 일부만을 포착할 뿐이다. 하지만 그 일부 속에 전체의 감정이 담겨 있다. 어떻게 보면 평이한 모습들이지만 영화를 소설로 만든 덕분인지, 아니면 작가의 능력 덕분인지 읽는 내내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연상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홀로 된 사치오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이 불안감이 파국으로 이끌지, 아니면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유려하고 섬세하게 감정을 다루는 문장은 영화라는 이미지를 통해 나에게 지속적으로 다가왔다. 절제된 감정 뒤에 숨겨진 불안감과 외로움은 그냥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상실 뒤에 조금씩 그를 잠식한다. 그러다 발견한 아내의 문자 메시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내의 삶.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과 작고 소중한 깨달음과 관계. 절제된 감정이 어느 순간 폭발할 때, 이것을 어리둥절해할 때,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난 감정을 볼 때 나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소설을 보면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참으로 오랜만에 했고,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불쑥 솟아났다. 아주 긴 변명의 끝에 드러난 진실은 아주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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