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처럼 지나간 여름의 기억을 다룬 소설이다. 일본 원제는 다른 것인데 번역하면서 책 내용과 맞춘 것 같다. 64회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간단한 책 소개만으로 그 매력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 제목이나 수상작이란 정보는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띠지도 겉장도 없는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고, 단단하고 분명한 문체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뒤늦은 나이에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이런 단단한 문장은 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라이 설계사무소 사람들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건축설계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소설에는 흔히 보게 되는 내부 인물 사이의 갈등이나 극적인 상황을 위한 인위적인 설정이 없다. 다만 무라이 설계사무소 직원들이 무라이와 함께 기타아사마 아오쿠리 마을의 여름 별장에 와 일을 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풀어낼 뿐이다. 이들이 함께 여름 별장에 온 것은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더운 도쿄보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이곳이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고, 번거로운 고객의 만남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설계사들의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소설의 많은 부분들이 설계와 관련되어 있다.

 

화자인 사카니시 도우루는 건축학과를 졸업한 신입이다. 그가 존경하는 건축가가 바로 무라이 슌스케다.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무라이의 나이가 많아지면서 신입을 몇 년째 뽑지 않고 있다. 그런 곳에 자신의 설계도면을 제출하고 뽑아달라고 요청한다. 합격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회사의 신입들은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무라이 설계사무소처럼 뛰어난 건축가들이 있는 곳은 특히. 열정과 노력이 있는 신입이라면 배움의 속도는 빠르다. 자신이 존경하는 건축가가 있는 곳이라면 더욱 더. 그가 무라이 건축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그가 건축한 교회에 갔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부분을 읽을 때 그의 존경과 감탄 등이 그대로 전해졌다.

 

프로젝트가 있다 보니 이것이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여름 별장에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이야기하지만 가장 큰 이벤트는 역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다. 단순히 건축물만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 속에 들어가는 가구와 동선과 바람의 흐름 등도 고려해야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다녔던 몇 개의 도서관들을 떠올려보지만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인터넷에 올라온 외국의 도서관 모습을 볼 때면 놀란다. ! 하나 다른 것이 있다.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지혜의 숲이다. 물론 효율적인가 하고 묻는다면 약간의 의문 부호를 남기고 싶다.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합숙을 하면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모습은 비전문가가 봐도 멋지다. 자신이 맡은 바를 최선을 다하면서 묵묵히 일하는 그들을 보면 어떤 때는 약간 답답해 보이지만 그들이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고, 개선할 부분과 고려할 부분을 말할 때 그 간단한 도면 뒤에 어떤 일들이 있는지 알게 된다. 작가는 이 상황을 넣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고, 건축가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 그리고 젊은 남녀를 등장시켜 이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같이 다룬다. 한 여름의 무더위를 피한 곳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로맨스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어느 한 곳으로 쏠리지 않았다. 변화의 바람을 살짝 넣어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루면서 원래의 목적을 잊지 않고 있다. 일과 사랑과 열정이 잘 짜인 구성 속에서 단단하게 뿌리를 박고 있다.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평생 가슴속에 품을 수 있는 일을 경험한 그곳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견고하게 다룰 수 있다는 부분에 박수를 보낸다. 큰 굴곡은 없지만 상황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몰입도를 높인다. 역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견고한 문장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면서 남기는 여운이 새로운 이미지를 전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책 속에서 다룬 건축물을 인터넷으로 검색한 것도 참 오랜만이다. <마천루>와 다른 이야기인데 건축가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문득 그 소설이 떠올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