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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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집 <블러드차일드>를 읽었다. 나의 취향과 조금 벗어난 작품도 있었지만 다양한 매력을 뽐내며 작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 그 후 이 작품 <킨>을 읽었다. 다 읽은 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 보통은 바로 서평을 작성하는데 가끔 이런저런 이유로 밀리는 경우가 있다. 이번 작품이 그런 작품이다.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것은 역시 <뿌리>였다. 오래 전 미리시리즈로 본 <뿌리>다. 소설은 사 놓고 몇 년 째 그냥 묵혀 두고 있지만 드라마는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쿤타 킨테라는 이름은 잘 기억하고 있다. 두 작품의 출간 연도를 찾아보니 <뿌리>가 먼저다.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1976년 6월의 어느 날 다나는 시간 여행을 한다. 그녀가 간 곳은 1815년 메릴랜드 주의 한 숲속이다. 그곳에서 물에 빠진 한 소년을 구한다. 백인 소년 루퍼스다. 보통의 백인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다나는 흑인 여성이다. 이 시대 흑인은 노예다. 물론 자유민도 있지만 <노예 12년>에서 보았듯이 언제든지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 금방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단발성 시간 여행이라면 문제가 없을 텐데 이 여행이 어떤 이유로 반복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 여행을 한다. 그리고 항상 그곳에는 위험에 처한 루퍼스가 있다. 그녀가 자신의 시대로 돌아오는 것은 반대로 그녀의 목숨에 위험을 느꼈을 때다.

 

시간 여행이라는 SF적 요소에 노예 문제를 결합시켰다. 많은 SF 작가들이 시간 여행을 다루었지만 이 작품처럼 노예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경우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단순히 노예 문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속에 살아가는 노예와 노예 주인의 감정과 시선을 같이 다룬다. 노예가 하나의 자산이었던 시절에 노예가 낳은 아이들도 주인에게 귀속된다. 이런 상황이니 노예 주인들이 흑인들을 더 가혹하게 다룬다. 누구나 자신의 재산이 사라지거나 줄어들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인들도 한 명의 인간이고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유를 향한 탈주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야기의 핵심에 놓인 두 인물은 역시 다나와 루퍼스다. 왜 루퍼스가 위험에 처하면 시간 여행을 할까? 그 이유는 루퍼스가 다나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시간 여행을 다룬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변주가 펼쳐지는 부분이다. 과거가 사라지면 현재의 나도 사라지는 가설과 평행우주이론 등 여러 가지 설정이 가능하다. 작가가 선택한 것은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다는 이론이다. 다나가 루퍼스에게 실망하면서도 그를 계속 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존재 때문이다. 물론 인간적인 동정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린 루퍼스를 교육해 계몽된 노예 주인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계획일 뿐이다. 아주 가끔 가서 몇 시간 혹은 몇 개월만 머물면서 기존의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노예 주인이 되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SF 설정 중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 흐름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의 몇 분이 과거 속에서는 며칠, 몇 개월에 해당된다. 다나가 과거 속으로 빠진다는 느낌이 들 때 남편 케빈이 그녀의 손을 잡는다. 같이 시간 여행을 했다. 그러다 둘이 헤어지고, 다나 홀로 현재로 돌아온다. 며칠이 지나간다. 하지만 시간 여행 속에서는 이미 몇 년이 지났다. 케빈이 다시 현재로 돌아와 적응하는 것을 힘겨워한다. 이런 설정은 나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 비대칭은 왜 설정한 것일까? 몇 번의 시간 여행은 또 왜 설정한 것일까? 문득 하나 떠오른 것이 있다. 바로 루퍼스다. 한 명의 노예 주인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주기에 가장 적당한 설정이 시간의 비대칭성이다.

 

보통의 시간 여행을 다룬 작품과 그 내용과 주제가 완전히 다르다. 속도감 놓고 보면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작가가 흑인 여성이란 사실을 감안하고 이 작품을 읽으면 아주 독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대적 배경도 노예제가 존재하던 남부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하고, 긴 장편을 완성했다. 노예제도와 그 시대의 삶, 이것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모습 등을 같이 다루면서 깊이를 더했다. 그리고 현재 다나의 남편 케빈을 백인으로 설정한 것도 그 시대와 충돌하게 만든다. 다나가 홀로 흑인 여성으로 떨어졌을 때 느낀 공포와 두려움은 그 시대의 단면을 아주 잘 표현해준다. 어떻게 루퍼스가 그녀의 선조가 되었는지 보여줄 때 예상했던 낭만은 그대로 사라진다. 현실이 남는다. 이런 점들이 이 소설을 더욱 빛나게 한다. 불편함과 두려움의 감정이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찾아 읽고, 다른 작품들이 더 번역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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