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지개 - 언어학 고종석 선집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고종석이란 이름을 나에게 각인시켜 준 것은 그의 책이 아니다. 자주 갔던 헌책방에서 몇 명의 중년들이 고종석의 글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기억하게 되었다. 그 후 한두 권정도 그의 책을 읽었다. 알고 보니 이상문학상에 그의 소설이 올라온 것도 있었다. 이때까지 이 이름은 기억하면 좋을 작가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러다 서평을 조금씩 쓰고 문장을 다듬으면서 다시 그의 이름을 들었다. 그의 문장을 칭찬하는 글을 읽고 관심이 생긴 것이다. 좀더 문장을 다듬고 싶다는 마음에서 관심을 가졌지만 언제나처럼 딱 그 정도에만 머물렀다. 이오덕 선생의 책처럼. 그러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와 언어학자인 그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1998년 10월 <인물과 사상>에 발표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와 그 나머지들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부분들이 다른 글에서 똑같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똑같아 다른 작가의 글이라면 표절이라고 할 정도다. 그리고 이 글에서 주장하고 있는 몇 가지 주장들이 다른 글에서 짧은 글도 다시 반복될 때 혹은 더 세밀하게 분석될 때 언어학에 문외한이 나는 미로 속을 헤맨다. 솔직히 말해 음운과 음소 등을 풀어서 설명할 때는 더 심했다. 과학적인 설명을 차분하게 분석하고 실험하고 이해할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첫 글인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는 한때 한국을 뒤흔들었던 영어공용화 논쟁에 대한 고찰을 담았다. 단순히 영어공용화만 다룬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복거일과 그의 논쟁자들을 같이 분석하면서 비판한다. 고종석이 복거일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부분에서 솔직히 의외였다. 나 자신도 한때 복거일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의 영어공용화와 재벌과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글을 본 후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왜 그가 자신의 스승인지 설명하고, 단순히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잘못을 구분한다. 그의 주장 중 일부를 현실과 미래에 비춰 받아들이는 부분도 있지만 독재 옹호 등의 부분에서는 정확하게 비판한다. 개인적으로 이 논쟁을 자신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비판할 때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그 논쟁의 다른 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감염된 인간이고, 감염된 언어의 사용자다.”라고 했을 때 한글 순혈주의에 잠시 빠졌다가 김훈이 순수한글로만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 여러 번 말하지만 우리의 이름부터 명사나 단어들 중 거의 대부분이 한자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일제를 거치면서 일본어의 침투가 심해져 알게모르게 사용하게 된 단어와 용어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훈민정음에서 사용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글자를 사용하면 표기하지 못할 말이 없거나 우리가 발음하지 못할 단어가 없다고 했던 것이 잠시 떠올랐다. 한글의 한계를 지적했던 부분에서 왠지 모르게 더 생각났다.

 

저자는 개인에 많은 무게를 둔다. 복거일을 옹호했던 것도 우리가 모두 그리스인이라고 말한 것도 우리는 모두 개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인류의 가장 기본적 단위로서의 개인,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인 말이다.” 그리고 “한글이 한자와 싸워온 과정은 그대로 민주주의가 봉건주이와 싸워온 과정이다”라고 한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경어법에서 “그 신분적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한국어가 민주주의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것”에서 나도 애정에 주름이 생겼다. 언어를 통해 민주주의를 엮어서 풀어내는 이런 글은 무의식 중에 자리잡고 있던 나의 위계의식을 한바탕 뒤흔든다.

 

이 책은 그 동안 그가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한 글들을 모았다. 그 글들은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한 고민을 담고 있다. 언어의 무지개란 제목처럼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다. 영어공용화, 한자교육, 표준어, 경어법, 호칭, 외래어, 로마자 표기법, 시제 등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부분이 있지만 몰랐던 부분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고, 간과하고 있던 부분은 새롭게 배우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대의 문장가란 찬사를 받는 저자의 글이라 상대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내용에 따라 쉽게 따라가지 못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언어학에 대한 그의 성찰은 단순히 언어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연관성을 같이 다루면서 그 깊이를 더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