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포로원정대
펠리체 베누치 지음, 윤석영 옮김 / 박하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가장 높이 올라간 산은 지리산 천왕봉이다. 자주 올라간 산은 북한산이다. 한때 몇 달 동안 북한산을 자주 올라간 적이 있다. 처음 갔을 때 산 잘 타는 친구를 따라가다 쥐가 나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고생했지만 나중에 홀로 올라가면서 생각보다 쉽게 정상까지 올라갔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몇 번 동안 나의 주말은 북한산, 관악산을 올라가는 것으로 아침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것은 아주 한시적이었다. 하지만 산을 올라가면서 느꼈던 그 기쁨과 즐거움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회사에서 단체로 가까운 산을 올라가면 튀어나온 배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호흡이 엄청 가빠오지만 말이다. 이런 낮은 산의 짧은 경험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나의 경험은 이들에게 뒷동산을 가볍게 산책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 포로들은 케냐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우지 않게 되면서 생명의 위험은 사라졌지만 가장 중요한 자유가 없어졌다. 이 포로수용소가 감옥 같은 밀착 감시 아래에 있는 곳은 아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결과를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이 수용소 생활이 축복일 수도 있었다. 많은 대문호들이 감옥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쓴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 수용소에서 시험을 준비하고, 외국어를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군의 특수성에서 비롯한 다양한 직업군 중에서 예술가도 있었다. 하지만 감옥과 달리 나갈 날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수용소 생활을 힘들게 만들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정체된 삶이 주는 무기력함에 빠져 있었다. 이런 삶에 열정과 의지를 북돋아주는 일이 생겼다. 바로 케냐 산 등반이다.

 

처음 이 책의 소개글을 읽었을 때 소설로 착각했다. 현실에서 수용소를 나와 등산을 한 후 다시 수용소로 돌아간다는 것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열정과 의지라면 탈출해서 다른 곳으로 가면되지 않는가 하고. 그런데 이 놀랍고 황당한 일이 실제 발생했던 일이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세 명의 남자들이 케냐 산을 등반 한 후 다시 감옥으로 무사히 돌아와서 남은 기간을 보낸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수용소를 탈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려준다. 몇 명의 탈주자들이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 있는데 처음에는 많이 공감했다. 하지만 이들이 케냐 산을 오르기 위해 어떤 사전 준비를 하고, 장비를 만들고, 식량을 모았는지 봤을 때 혹시 이들이 탈출을 시도했다면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물자가 제한된 포로수용소. 대규모 인원이 수용되면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탈출 외에 그들이 기획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무기력한 일상이다. 이때 저자는 눈앞에 드러난 케냐 산봉우리를 보게 된다. 그의 마음이 빼앗긴다. 황당하고 위험한 계획을 세운다. 그것이 바로 케냐 산 등반이다. 수용소에 갇힌 상태에서 그는 등반 준비를 한다. 만년설이 깔린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두툼한 옷이나 피켈이나 아이젠, 텐트 등의 등산 장비가 필요하다. 수용소가 그들의 등반을 응원할 리가 없는 상황에서 이 모든 물품을 그들이 준비해야 한다. 그것도 몰래. 동시에 같이 갈 동료도 모아야 한다. 첫 동료로 의사인 귀안을 맞이했지만 세 번째 동료 찾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초반부는 바로 이런 준비 과정과 수용소 풍경을 묘사하는데 그들의 열정과 의지가 얼마나 단단하고 대단한지 잘 드러난다.

 

어렵게 세 번째 동료로 엔초를 받아들였다. 이제 그들은 준비한 물품들을 들고 수용소를 벗어나 케냐 산을 향해 걸어간다. 원래 일정은 14일 정도였는데 실제는 18일 정도 걸렸다. 정상적인 체력에 풍부한 물품을 지원받았어도 성공할 확률이 그렇게 높지 않은데 그들은 용기 있게 도전했다. 이 용기의 일정 부분은 몰라서 생긴 것이다. 책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지만 그것이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잡혀 다시 수용소 감옥에 갇힐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직접 쓰레기 더미를 뒤져 힘들게 만든 장비들과 조금씩 아껴먹고 남겨둔 식량을 가지고 이들은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예상했던 낭만적인 모습은 금방 사라지고 난관들이 하나씩 등장한다. 그래도 그들의 의지와 열정은 꺾이지 않는다.

 

실제 그들이 처음 목표했던 바티안 봉은 오르지 못했다. 날씨도 준비된 물품도 그들의 체력도 모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지원을 받은 등산가도 쉽지 않은 곳이 바로 이 바티안 봉이다. 하지만 이 바티안에 대한 그들의 도전이 무지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순수하고 위대한 일이다. 최선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차선은 달성했다. 아쉬움이 남지만 그들에게 가장 먼저 닥친 문제는 하산과 허기와 체력 저하 등이다.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힘겹게 걷는 것을 보면서 한때 지리산을 내려오면서 느꼈던 그 감정이 잠시 와 닿았다. 등산 용어를 잘 몰라 그 긴박감이나 상황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위험에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황당하고 미친 듯한 등반이지만 ‘포로수용소의 고리타분한 삶에 대한 반항’과 ‘무기력함 속에서도 의지를 드러내 보인 행동’이었음을 나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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