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에 여름휴가를 떠나면서 세 권의 책을 챙겨 갔다. 그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이 책을 읽었다. 혼자 간 여행이라면 조금 더 시간을 내어 책을 읽을 수 있겠지만 동행이 있어 한 번에 긴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예전에 혼자 갔을 때도 사실 책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았다. 일종의 변명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나에게 큰 화상을 안겨줬다. 호텔 수영장에서 한두 시간 열중하다 드러난 신체 곳곳이 빨갛게 익은 것이다. 이날 이전까지 햇볕을 잘 피했는데 말이다. 울티모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심하게 몰입한 모양이다.

 

책을 읽기 전과 다 읽은 후 그냥 표지를 보았을 때 이 사람들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하나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장년이 된 울티모의 한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표지를 보면서 바로 그 장면이 생각나지 않은 것은 이 소설의 구성과 이야기 방식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만 몇 사람의 화자를 등장시켜 울티모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울티모를 직접 보여준다기보다 그들의 삶과 울티모가 교차한 순간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이 교차하는 순간들이 단순한 해프닝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관통하는 주요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다. 도입부가 자동차 경주라면 다음 역사는 제1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 그중에서 카포레토 전투다.

 

울티모. 마지막 아이란 뜻이다. 이 아이는 신의 가호 속에 성장한다. 특별한 아이다. 그가 나타나면 금빛 그늘 때문에 사람들이 금방 알게 된다. 울티모의 아버지는 아직 자동차가 귀족들의 놀이기구였던 시절에 가축들을 팔아서 자동차 수리점을 열었다. 이 일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토리노의 안개 낀 밤길을 헤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울티모에게 자신만의 서킷을 만들도록 한다. 이후 울티모 삶의 목표는 바로 이 서킷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서킷이 완성된 후 삶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 그가 만든 서킷을 엘리자베타가 달리면서 인생을 느낄 때 묘한 감동이 전해진다.

 

울티모가 주인공이지만 그가 전면에 나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 않는다. 그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 울리모의 삶을 흘려보낸다. 바로 역사와 사람이 중심에 있고, 그 주변에서 살짝 울티모가 등장하는 방식이다. 이 전개 방식은 어느 순간에는 집중력을 떨어트리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특히 카포레토 전투는 그 역사의 현장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울티모의 미래를 결정짓는 역할을 맡는다. 엄마의 외도와 아버지의 자동차 사고로 인한 미래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넘어 운명과 꿈에 대한 자각으로 연결된다. 자신이 계획한 자동차 서킷을 건설하기 위해 돈을 벌려고 미국으로 넘어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그의 삶을 알려주는 역할은 러시아 혁명 당시 몰락한 귀족의 딸 엘리자베타다. 그녀의 일기를 통해 그녀가 바라는 삶과 살고 있는 삶을 보여주고, 그 사이에 울티모를 등장시킨다. 울티모가 주인공이라기보다 오히려 조연이다. 그런데 점점 나이 든 엘리자베타가 등장하면서 울티모의 존재감 커진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이어져 있던 감정, 바로 사랑이 점점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사랑의 환상을 보여주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을 조용히 그려낼 뿐이다. 이 교차하는 순간들 속에 앞에 나온 거짓말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이 설정은 당연한 듯 받아들였던 이야기를 다시 되짚어 보게 만든다.

 

울티모는 사람들이 길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길이 사람을 길들인다고 말한다. 맞다. 사람들이 길을 내지만 기본적으로 자동차는 길을 달려갈 뿐이다. 만들어진 길을 달리는 것이 경주인데 이것은 사람들의 운명이나 삶과도 이어진다. 정해진 길을 가야하고, 길 어딘가에서 언제 멈춰 설 줄 모른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차들이 이 길을 벗어나면 바로 죽음이 기다린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아주 중의적이다. 에필로그에서 울티모가 만든 서킷을 찾아서 재건한 후 엘리자베타가 달릴 때 그 서킷에서 울티모의 인생을 경험한다. 그가 남긴 그림의 비밀에 도달했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아주 매혹적인 장면이다. 여기서 엘리자베타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갖고자 간절히 욕망한다. 그 욕망의 끝에는 울티모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