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타임 사계절 1318 문고 88
마고 래너건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SF 판타지 단편집이다. 모두 열 편이 실려 있다. 이 열 편이 나를 혼란으로 이끌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비약으로 이어진다. 이 순간 당황한다. ‘뭐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는 대부분 낯설다. 익숙한 것도 해설을 보면 착각했다. 흔히 하는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런데 힘들게 쌓았던 이미지가 순식간에 무너진다. 무너지면서 다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이 상황이 반복된다. 시대나 상황에 대한 배경 설명이 없다 보니 더 그렇다.

 

열 편 중 비교적 쉽고 재밌게 읽은 것은 세 편이다. 표제작 <화이트 타임>, <말하고 키스하라>, <소원이 없는 소년>. 이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쉽고 흥미있게 읽은 단편은 <말하고 키스하라>다. 아주 재미난 설정을 가졌는데 그것은 가슴 속에 담긴 말을 하지 않으면 살이 찐다는 것이다. 한때 상당한 비만을 가졌던 그가 속내를 쏟아내면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그런데 친한 친구처럼 지냈던 여자 아이를 다른 남자가 사귀어도 되는지 물으면서 문제가 생긴다. 뻔한 설정이지만 속내와 살을 연관시킨 것과 풋풋한 사랑이 밖으로 표현될 때 살짝 미소를 짓게 한다.

 

<화이트 타임>은 놀라운 설정을 가졌다. 시간 여행자들이 정체된 공간을 화이트 타임이라고 하는데 이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 직업을 맛보기 위해 간 셔닐이 겪게 되는 사건과 상황은 표면적으로 밋밋한 것이지만 한 소녀의 삶을 뒤흔들기는 충분하다. 체험기가 너무 간결한 반면에 실제 이야기는 아주 풍성하다. 이 차이만큼 소녀는 성장한다. <소원이 없는 소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녀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한다. 마지막 반전 같은 장면은 강한 여운을 남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참혹한 <봉헌식>,착각하게 만든 환경을 가진 <여왕의 관심>, 자신을 좀더 돌아보게 만드는 <커다란 분노>, 실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밤 백합>, 세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한여름의 임무>, 밋밋한 이야기가 반전으로 이어지는 <웰컴 블루>, 고대 이집트를 연상시키지만 미래를 생각나게 하는 <재산>. 이 모든 작품들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이다. 불안, 의심, 참혹함, 욕망, 분노, 사랑, 믿음 등을 하나씩 혹은 둘 이상 엮어서 풀어낸다. 공감대가 형성되는 이야기도 있고, 배경을 찾다가 미로 속을 헤매면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한 단편도 있다.

 

분명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단순히 이야기만 따라만 가서는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다. 이야기의 서사가 강해 충분한 재미를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각 다른 공간과 시간대를 보여주는데 그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공간과 다르다. SF소설의 설정인가 하면 판타지고, 판타지인가 하면 역사 단편소설 같다. 그래서 SF 판타지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거대한 상상력이 힘을 발휘하는 단편도 있지만 작고 미세한 세계를 다루기도 한다. 이 차이는 사실 별로 없다. 단지 이 단편을 읽은 독자가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 곳까지 다가갈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나의 경우는 살짝 맛만 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