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인물
수잔 최 지음, 박현주 옮김 / 예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가 일품인 소설이다. 읽는 내내 리 교수의 솔직한 감정과 심리 변화에 놀랐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고록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동료 교수에게 온 폭탄의 폭발이다. 이 폭발이 잊고 있었던 혹은 잊고자 했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심장과 머릿속에서 터트렸다. 작가는 이 과정을 아주 세밀하면서도 치밀하게 풀어낸다. 느린 템포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놓치는 부분이 많다. 가끔 리 교수의 심리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결론이 나올 때 혹시 하는 마음이 든다.

 

처음에 리 교수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분명히 한국인인데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그가 한국에서 와 학위를 딴 후 교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이 알려지기 전까지 피부색에 대한 묘사도, 인종에 대한 설명도 없다. 의도적인 연출인데 이것이 뒤로 가면서 그가 겪게 되는 수많은 갈등과 문제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인류라는 것으로 묶을 수 있지만 현실에서 이 피부색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에서 그런 설명이 빠진 것은 역설적이다.

 

요주의 인물이란 설명이 나중에 나온다. 용의자 대신 사용한 단어다. 이 단어는 언론을 통해 발표되어지는 순간 용의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변하게 된다. 폭탄이 터진 후 리는 방송 인터뷰를 통해 용기 있는 지식인이 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이것은 자신의 의도와 감정에 몰입하면서 몇 가지를 속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FBI가 그를 주목한다. 그가 숨긴 것은 그의 아내 에일린과 그녀의 전남편 게이더에 대한 것이다. 사건 후 그에게 온 한 통의 편지를 그는 게이더가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답장을 보내지만 반송된다. 리 교수가 생각한 폭탄테러범의 정체는 바로 게이더다. 이 사실은 그가 FBI에게 숨긴 것이다. 그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의 현재를 설명하고 묘사한 장면들을 보면 황량하다. 누구보다 미국인처럼 살아가는 것 같은 그의 삶은 비어있다. 두 번의 결혼이 남긴 흔적은 유물처럼 집에 남아 있다. 유일한 딸은 자신의 삶을 찾아 어딘가로 떠났고 제대로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일상의 반복은 외로움과 회고로 가득하다. 이야기는 과거 속으로 빠져들고 그 속에서 과거의 그를 만나게 된다. 미국 대학에 와서 결혼 전 친구처럼 지냈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들에 대한 개인 감상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독실한 선교를 꿈꾸는 게이더와 그의 아내 에일린이 나오면서 변화가 생긴다. 에일린과의 불륜, 그녀의 임신, 출산과 아빠인 게이더에게 빼앗긴 아들. 이 격렬한 감정의 변화 속에 리가 보여준 행동은 냉정하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다. 어쩌면 이때부터 에일린과의 관계에 틈이 생긴 것인지 모른다.

 

그의 첫 결혼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반면에 두 번째 결혼은 거의 설명이 없다. 일본 여자였다는 것과 그와의 결혼 생활을 힘들어했고 영주권이 나오자 떠났다는 것 정도다. 길지 않은 결혼 생활이었고 그의 삶에 끼친 영향이 별로 없었다. 현재 그의 삶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내는데 중요한 인물이 아닌 것이다. 이 소설이 미스터리로 분류된다면 역시 가장 먼저 폭탄을 보낸 인물이 누군가일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게이더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먼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누구? 단서가 전혀 예상 외의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금방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중반 이후 그 사실을 깨달았다.

 

폭탄범이 누군지 하는 것과 함께 또 하나의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리의 마음이자 숨겨져 있던 과거다. 그의 솔직한 속내가 용기와 더불어 드러나면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결혼의 실패 원인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의 삶 한 곳을 지배했던 망령에서 벗어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하나의 사건을 통해 한 노교수를 성장하게 만드는 성장소설이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수많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의 해설에서 모티브가 된 폭탄테러범 유나바머, 테오도어 카잔스키 사건을 언급한 것도 또 하나의 해석이다. 지금까지 사놓고 그냥 놓아두기만 한 그녀의 다른 소설들이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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