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한 파국 - 슬라보예 지젝의 특별한 강의
이택광.홍세화.임민욱 지음 / 꾸리에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제처럼 슬라보예 지젝이 서울을 방문한 후 가졌던 인터뷰와 강의와 대화 등을 엮은 책이다. 지젝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이 십 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실제 글로 만난 것은 최근이다. 하지만 진짜 지젝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짜 지젝이라고 했지만 그의 책이 아니라 인터뷰 등을 통해서 만났다. 잘 된 인터뷰의 경우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홍세화의 인터뷰가 그렇다. 이 인터뷰를 통해 그리스 사태와 이집트 민주화의 실상을 좀더 알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 그의 철학 한 자락을 배웠다.

 

그리스 선거에 내가 주목한 것은 유럽 경제 위기의 한 축이 바로 그리스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 사태는 우리의 정치에서도 그대로 왜곡된 채로 이용되었다. 본질보다는 피상적인 것에 더 집중하면서 사실을 호도한 것이다. 이런 호도에 대해 그가 바로잡아준 몇 가지 사실은 놀랍다. 한국의 진보정당 정도의 지지율을 가진 시리자가 정권을 잡을 뻔했다는 것과 시리자의 정책 등을 어떤 왜곡으로 변질시켰는지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실험장이 되었다고 하면서 이제 자본주의가 새로운 국면을 접어들었다고 할 때 고민이 시작된다.

 

이슬람 형제단이 집권한 이집트로 가면 우리의 87년 민주화와 08년 촛불집회를 자연스레 연상하게 된다. “수백만이 광장에 모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변화를 어떻게 느끼는지 그것이 핵심이죠. 이 지점에서 좌파의 고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43쪽) 이 문장은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좌파에 실용주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직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이 땅의 진보가 과연 이런 비전을 보여줬는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상술과 양심의 허접한 결합을 말할 때 순간 뜨끔했다. 없는 것보다 나을 수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것은 그들에게 마케팅의 수단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의 예를 들었는데 사실 커피 한 잔 사먹는 돈을 직접 보낸다면 나 한 사람이 스타벅스 구매자 백 명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은 현재 새누리당이 종북을 외치면서 이데올로기 논쟁을 그만두자고 하는 현실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우리 경제의 핵심에 놓여 있다는 지적은 깊게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했을 때 그가 겪은 참혹했던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한 단면은 자유와 파시즘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너무 단순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파시즘이 규율의 억압만이 아니라 사람을 이끄는 잘못된 자유의 측면이 있다는 사실”(111쪽)을 직시하면서 놀라운 결과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인에 대한 지젝의 평가는 지금 김지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일정부분 동의하게 되었다. 아니 그가 보여준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지 않냐고 변명할 수 있지만.

 

‘존재하는 모든 폭력을 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이미 민족주의 혹은 이기주의에 휩싸여 있음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등지에서 자국민 사이에 일어난 대학살에는 관심이 없다가 그 나라의 백인 지주 등이 죽었을 때 흥분하고 여론이 들끓어 오르는 현실을 지적할 때 더욱 분명하다. 사람의 목숨이 모두 똑같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의 가치로 나누는 현실을 말할 때 폭력은 왜곡된 채로 남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런 유럽과 반대현상이 보이는데 그것은 대기업의 이익을 반영할 때다. 이것은 그가 ‘간디가 히틀러보다 더 폭력적이었다’(153쪽)고 말한 것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택은 선택이 아닌 단순한 기호다. 문제 자체가 다르다. 역설적이란 말처럼 선택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은 진짜 선택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지젝이 이라크 전쟁을 예로 든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우리의 여론 조사 과정에 선택을 가장한 여론 조작이 얼마나 빈번하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이 책을 모두 읽은 지금, 단 한 권의 지젝 책을 읽지 않았지만 어렵다는 그의 철학책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