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팬 로드 - 라이더들을 설레게 하는 80일간의 일본 기행
차백성 지음 / 엘빅미디어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어릴 때 많은 사람들처럼 네발 자전거로 자전거 타기를 배웠다.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엄마가 뒤에서 두발을 뗀 자전거를 잡아주던 장면이다. 요즘 자전거를 배우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는 풍경인데 자전거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몇 가지 추억 중 하나다. 초등학교 시절 자전거는 놀이기구이자 밖으로 좀더 멀리 나가는 도구였다. 지금이야 당연히 차를 몰고 더 멀리 나가지만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도구였다. 그때 아이들을 데리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는데 더 큰 후 자동차로 가니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였다. 아이들이 보는 세계가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것을 멈춘 것이 아마 대학 때일 것이다. 집으로 내려가면 집에 있는 자전거를 가끔 타지만 어중간한 거리는 걷고, 좀 먼 거리는 버스를 탔다. 가끔 충동에 휩싸여 자전거를 타고 달리지만 허약해진 다리와 폐는 힘겹기만 하고 멀리 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당시 자전거로 하고 싶은 여행이 있었다.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한 번은 걸어서 일주를 하려고 했는데 너무 무리한 행동임을 깨닫고 금방 중단했다. 그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자전거다. 이것은 언제나처럼 그냥 상상으로 멈추고 말았다. 다른 수많은 계획들이나 희망사항처럼.

얼마 전 한 부부가 후배를 데리고 자전거로 아프리카를 여행한 책을 읽었다. 정말 대단했다. 부러웠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라이더 한 명이 자전거로 일본을 달린다고 한다. 그러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다른 책을 그냥 사놓고 묵혀 두고 있는데 이 책을 먼저 읽은 것은 최근에 주변 사람들이 일본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철도를 이용해 일본을 여행한 책도 읽은 적이 있다. 각각 다른 수단을 통해 일본을 보고 왔는데 읽으면서 둘이 겹치는 곳이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각각 다른 관점에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인지 표현하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철도여행이 정보 중심이라면 <재팬 로드>는 감상 중심이다. 그래서 읽는데 걸린 시간도 훨씬 길다.

처음에는 한 번에 일본 전역을 돌았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모두 세 번에 나누어서 다녀왔다. 테마별로 규슈와 쓰시마, 오키나와 시코쿠, 혼슈와 홋카이도 등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배로 들어가서 일본 속 우리의 흔적들에 집중하였고, 다음은 시코쿠의 88개 사찰 순례길을 찾아서 돌았고, 마지막은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더듬었다. 각각 다른 기획을 가지고 일본 각지를 자전거 타고 돌아다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저자의 감상을 따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과거와 현재 역사에 대한 단상들로 인해 경계가 무너진다. 단지 다른 지역일 뿐 하나의 일본과 우리의 역사가 겹쳐지면서 풀려나오는 감상들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이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책을 읽으면서 시선을 끈 것은 “자유에 지칠 때면 질서로 돌아온다. 질서는 내가 매여 있는 일상이다.”(7쪽)이란 문장이다. 약간 길었던 백수시절 바빴던 직장생활이 그리웠을 때가 생각났다. 그리고 다시 “흔히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너무 빨라’라고 탄식하지만 이는 변화 없는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61-62쪽)란 문장을 만나면서 다시 일상에 지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매여 있는 몸이니 쉽게 떠나지 못하는데 이 두 문장은 나의 삶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 그러니 밑줄을 치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공감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나오면서 그의 자전거를 따라 일본을 돌아다닌다.

80일간의 일본 기행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장소들과 사람들과 유적들은 단순한 눈요기 거리가 아니다. 저자는 관광이 아니라 자전거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신의 지식과 철학을 통해 하나씩 풀어내고 있다. 사전 준비가 얼마나 잘 되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역사와 관련된 부분에서 만나게 되는 정보와 역사 인식은 풍부하고 한일문제와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가끔은 무심코 보았던 것을 다시 한 번 더 보게 한다. 또 화려하지 않은 여행을 하면서 얻게 되는 수많은 장점들을 보게 되는데 가슴 한 곳에 학창시절 못했던 제주도 일주의 꿈을 다시 꾸게 만든다. 그리고 내년에는 짧은 시간이나마 일본을 한 번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강하게 든다. 

흔히 만나게 되는 여행 정보지처럼 맛있는 집이나 절경이나 좋은 숙소에 대한 정보는 없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여행하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운다. 그가 간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간 곳에서 나눈 역사와의 대화에 더 마음이 간다. 점점 게을러서 자동차로도 여행가기를 꺼리는 나 자신에게 자전거를 타고 일본을 아프리카를 달린 사람들의 용기와 열정은 부럽고 잠들어 있던 열정에 불을 지핀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임을 얼마 전 경험했기에 더욱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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