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무정 1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만 놓고 본다면 무협소설이 생각난다. 처음에 끌렸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김탁환임을 알게 되면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까 궁금했다. 내가 읽은 그의 소설 대부분이 시대물임을 생각하면서 책 소개를 읽었다.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조선 마지막 호랑이와 개마고원 포수의 7년에 걸친 추격전’이란 문구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이제는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호랑이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멸종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그 호기심을 채워줄 소설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했다. 그리고 이전에 시베리아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 시대 말기다. 주인공은 개마고원 포수 산과 백두산 호랑이 흰머리다. 이 둘은 악연으로 이어져있다. 흰머리의 새끼들이 산의 아버지 일행 때문에 죽었고, 이 때문에 흰머리에게 산의 아버지가 죽고 동생 수는 팔 하나를 잃었다. 가족을 잃은 산이 복수를 위해 흰머리를 좇은 것이 7년이다. 그 사이에 개마고원 포수로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바란 것은 단 하나다. 바로 흰머리를 쏘아 죽이는 것이다. 흰머리와의 대결에서 패해 큰 부상을 입었지만 사냥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그가 나아간 곳은 바로 흰머리가 출몰하는 개마고원이다. 여기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산과 흰머리의 숙명적인 대결과 산과 주홍의 절실하고 뜨거운 사랑이다. 흰머리와의 대결이 서로 죽이고자 하는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주홍과의 사랑은 추운 개마고원의 찬바람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뜨겁게 피어난 것이다. 가장 중요한 흰머리와의 추격전은 읽기만 해도 추운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흰머리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산과 해수격멸대란 조직을 이끌고 온 히데오 대장의 충돌은 서로 다른 욕망의 충돌이다. 복수하고자 하지만 너무나도 신중한 산과 만용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자연과 흰머리에 무지한 히데오. 여기에 호랑이 생존에 대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주홍의 등장으로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사랑의 삼각관계가 만들어진다. 

그 추운 개마고원에서 조선 호랑이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과 살리고자 하는 사람의 충돌 속에서 피어날 사랑을 그들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 독자인 우리는 시작과 동시에 미리 예상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의 충돌은 7년간 복수만 생각한 남자를 생각할 때 너무나도 무모하고 순진하다. 하지만 이 둘은 홀로 살아간다는 외로움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호랑이의 혼을 지닌 채 흰머리를 사냥하러 다니는 산에게 그미가 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산에게도 그녀의 무모할 정도로 순진한 행동과 열정이 차갑게 식은 가슴 한 곳을 데워줬을 것이다.

추운 겨울 개마고원을 헤집고 다니면서 벌어지는 추격전은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지루할 때도 잠시 나타나지만 욕망과 집념과 집착과 순수함이 충동하면서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불협화음이 너무나도 간단하고 분명한 산과 흰머리의 대결로 가볍게 날아간다. 자연에 대해, 흰머리에 대해 잘 모른 사람들이 단순히 호기와 만용으로 다가갈 때 산의 경고는 무시되고, 그 결과는 참혹하다. 가끔 이런 맹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을 때 자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이런 설정은 산과 흰머리의 대결을 돋보여주는 동시에 당연히 동물보다 사람이 똑똑하다는 오만을 무참하게 짓밟는다. 

소설 중반까지 나를 분노하게 만든 인물은 다름 아닌 주홍이다. 산의 복수를 위한 집념을 조선호랑이의 생존이라는 자신의 욕망(?)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흰머리에게 공격받아 죽어가는 현실에서 그녀의 논리는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져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맹수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살인은 자기방어에서 비롯한 것이 대부분이다. 읽는 순간 울컥했던 감정들이 이성으로 돌아오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에 대한 감정이입이 심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소설들에서 철부지 여자들에서 비롯한 수많은 죽음을 연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잘 읽히는 소설이다. 간결한 문장과 개마고원의 깊고 웅장한 풍경 묘사는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산과 함께 밀림을 헤치며 흰머리를 좇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풍경은 아쉽게도 외국 영화에서 본 것들이다. 제대로 한국의 밀림을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이야기지만 그 시대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삶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직 산과 흰머리의 대결만이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대결이 가끔 무협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그들이 느끼는 긴장감과 단 일합의 승부 때문이다. 첫발이 실패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포수의 운명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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