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기린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소녀들의 이야기란 말에 끌렸다. 물론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란 이유가 더 크다. 하지만 읽으면서 미스터리 느낌보다 소녀들의 섬세한 감정과 외로움이 가슴에 더 와 닿았다. 연작단편처럼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첫 편과 마지막 편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이 화자로 등장하여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래서 처음엔 어! 하고 살짝 당황한다. 그렇지만 곧 그들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각각의 가슴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누가 열일곱 살 안도 마이코를 죽였을까? 하는 의문을 머릿속에 담아둔 채로 말이다.

첫 장면부터 위험해 보인다. 한 소녀가 걷고 있고, 칼을 던 남자가 위협한다. 소녀는 달아난다. 그리고 바뀐 장면에서 안도 마이코의 죽음이 나온다. 당연히 앞에 나온 소녀가 안도 마이코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아니다. 앞에 나온 소녀는 같은 반 노마 나오코다. 이런 설정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위한 하나의 장치다. 그것이 비록 끝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말이다. 첫 장 <유리기린>은 이렇게 조그마한 착각으로 시작한다. 감정의 혼란과 죄책감과 공포가 뒤섞이고,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진다. 마이코가 쓴 동화 <유리기린>을 중간 중간 흘려보내 그 소녀의 감정을 드러낸다.

이어지는<3월 토끼>는 마이코의 담인 오바타 선생이 관찰자다. 나이든 선생들이 요즘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대목에서 역시 예전 선생들의 말이 생각났다. 안도 마이코의 학교생활과 그녀가 학교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말한다. 반 친구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안타까워한다는 사실은 너무 날카로운 사실이다. 학년말 반 분위기와 서로 엇갈린 감정과 대화부족은 오해를 불러온다. 여기서부터 진노 양호선생이 보여주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추리와 분석은 그녀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든다.

화자가 바뀐 <닥스훈트의 우울>은 고입을 앞둔 다카시 이야기다. 그는 소꼽친구 미야를 좋아한다. 그를 깨우기 위해 엄마가 미야가 전화했다고 거짓말을 할 정도다. 그런데 진짜 전화가 온다. 그녀가 주워 키운 고양이 미아가 다쳤다고 말이다. 동물병원 의사에게 최근에 다친 동물들이 많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특별히 주의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동물들의 상처가 결코 범상하지 않다. 이때 집에 놀러온 나오코를 통해 진노 선생의 추리가 빛을 발한다. 범상치 않은 여탐정이 등장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생긴다.

<거울나라의 펭귄>은 학교로 돌아온다. 마이코의 친구 중 한 명을 둘러싸고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진노 선생을 통해 여학생들의 외로움과 절박함을 말한다. 아이들의 행동과 심리를 이렇게 섬세하고 아슬아슬하게 그려낸 작가가 있을까 할 정도다. 안도 마이코 유령 이야기로 시작하여 눈에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두려움을 그려낸다. 혼자 있는 순간 그 두려움은 뼈 속 깊숙이 파고든다. 그리고 드러나는 반전은 다시금 진노 선생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앞의 이야기들이 현재를 그려낸다면 <어둠의 까마귀>는 과거 속으로 우릴 데리고 간다. 그것은 졸업생 유리에를 통해서다. 이번 이야기의 화자는 야마우치 신야, 그녀의 남자친구다. 그는 유리에에게 청혼을 한다. 그녀의 대답은 ‘예스’도 ‘노’도 아닌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이때부터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고, 악의가 드러나고, 새로운 어둠이 하나씩 밝혀진다. 사람들의 조그마한 말 한 마디, 의식하지 못한 집단의 장난 등이 불길한 현실과 섞이면서 과거가 어떻게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에겐 진노 선생이 있다. 분명하게 사실이 드러날수록 그 어둠은 조금씩 물러난다.

<마지막 네메케토사우루스>는 마이코가 쓰던 동화 제목이다.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모든 것을 가진 듯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 장이다보니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누가 범인인지 밝힌다. 약간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다.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고, 말이 저주의 주술로 사람을 가두는 그 순간 과거는 다시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가장 냉철하고 탁월한 추리능력을 가졌던 진노 선생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너무나도 그녀들과 닮았던 그녀 말이다. 미래의 밝은 면을 보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에게 현재의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은 과거가 된 순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또 어떤 현재가 만들어질지 모른다. 뒤끝이 앞의 어둠을 지우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