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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 여기 잠들다
필립 리브 지음, 오정아 옮김 / 부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수많은 전설과 신화 속에서 아서 왕은 조금 특별하다. 그 특별함은 어린 시절 본 애니와 영화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그대로 간직되고 있고, 내 속에서 점점 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신검 엑스칼리버가 아닌가 생각한다. 선택받은 인물이란 것과 기사도로 대변되는 원탁의 기사는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로 구축되었다. 여기엔 어릴 때 본 애니가 크게 한 몫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이미지를 산산조각낸다. 그 옛날 영화 <엑스칼리버>가 한 번 깨트렸던 이미지를 다시 말이다.
필립 리브는 견인도시 연대기로 처음 만났다. 잘 만든 sf소설이란 호평 덕분에 관심을 가졌는데 재미있었다. 그런 그가 영화 <엑스칼리버> 이후 아서 왕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현실적인 아서 왕을 그려내었다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버나드 콘웰의 <윈터 킹>에서 실제 있었을 것 같은 아서 왕을 만났기에 그는 어떤 식으로 그를 현실로 불러내었을까 궁금했다. 첫 장면을 보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아서의 어린 시절이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혀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시녀 그위나다. 이 소녀의 등장과 더불어 우리가 알고 있던 아서 왕은 사라지고 야만인에 폭군인 아서 왕이 등장한다. 사실 이 등장은 너무나도 낯설고 이질적이라 어떤 반전이 후반에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위나의 성주는 아서 왕의 공격으로 죽고, 그녀는 겨우 살아나서 달아난다. 물속에서 힘겹게 나온 후 만나게 되는 인물이 아서의 음유시인이자 마법사로 알려진 마르딘이다. 그는 색슨 족을 브리튼에서 몰아낼 인물로 아서를 선택했고,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뭉치게 하기 위해 아서에 대한 전설과 신화를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그의 무공과 용기와 인물을 상상력으로 꾸며서 퍼트리는데 이것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아서 왕의 전설과 비슷하다. 마르딘은 이런 이야기의 힘을 통해 아서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지만 현실에서 그는 이 전설을 전혀 뒷받침하지 못한다. 이런 괴리감은 이 소설에서 모든 갈등과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사실 아서 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위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녀에서 생존을 위해 소년으로 분장하고, 이후 다시 소녀로 돌아오는 그녀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마르딘의 시종으로 돌아다니며 남자 아이들과 우정을 쌓는 것이나 이제 여자의 모습이 뚜렷해지면서 다시 여자로 돌아오는 그녀의 변신은 그 시대 상황과 함께 변한다. 이 변화가 약간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지만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는 마르딘의 말처럼 이야기 속에 녹아든다. 이후 펼쳐지는 그녀의 활약과 좌절과 고통과 사랑의 감정들은 영웅 전설에 가려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펼쳐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삶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고 하여도 말이다.
아서 왕에 대한 전설은 사실 만들어진 것이다. 기록도 없고, 실존 인물인지도 알 수 없다. 아서 왕을 성배와 연결시킨 이야기와 원탁의 기사들을 등장시킨 이야기가 큰 줄기를 형성한다면 조금 더 현실성을 부여한 아서 왕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도 작가의 상상에 의한 창작이다. 너무나도 세련된 이야기는 중세 유럽의 생활상을 생각하면 사실 맞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많은 아서 왕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상상력의 의해, 기존 이미지에 의해 만들 수 있는 매력이 많다는 의미다. 물론 개인적인 호불호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지만 말이다. 만약 기존 아서 왕에 대한 이미지를 깨트리고, 조금 더 현실적이고 색다른 느낌을 받고 싶다면 필립 리브의 아서 왕을 만날 것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