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아마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이 <아웃>일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그 분위기와 전개와 구성에 완전히 반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추리소설을 많이 읽지 않은 때라 더 그랬다. 그러면서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몇 권 더 읽었지만 <아웃>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아웃>과 나란히 놓아두고 싶은 작품을 만났다. 아직 사놓고 읽지 않은 그녀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몇 권 더 생길지 모르지만 말이다.

1993년 미로 시리즈 첫 권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사실 상의 데뷔작으로 제39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에 대한 소개 중 눈길을 끈 것은 ‘일본 여성 하드보일드의 위대한 시작점’이란 평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하드보일드 최고봉으로 하라 료의 작품을 꼽는데 이 작품은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그녀는 탐정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남자 탐정처럼 무력을 어느 정도 갖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라노 미로가 어떻게 탐정 일을 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사람들의 관계와 삶은 어둠 저 깊은 곳에서 급격하게 떠오른다.

어느 소설처럼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한다. 미로는 자살한 남편에 대한 기분 나쁜 꿈을 꾸다가 깬다. 그녀를 깨운 것은 전화벨 소리다. 시간은 오전 3시 조금 전이다. 받지 않고 그냥 잔다.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한 남자에게 전화가 온다. 그녀가 있는지를 알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곧 나루세가 온다. 그는 친구 요코의 남자 친구다. 그가 온 이유는 요코가 1억 엔을 들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돈이 야쿠자의 돈임을 생각하면 위험하다. 이때만 하여도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무력증에 빠져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다. 바로 요코의 실종과 1억 엔이 맞물려 그녀를 조사 탐정의 길로 인도한다.

1억 엔. 요코의 실종. 이 둘은 동시에 생겼다. 이 둘을 같이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왜 위험한 1억 엔을 들고 달아난 것일까? 이런 의문을 뒤로 하고 미로와 나루세는 그녀의 흔적을 쫓게 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실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요코의 모습이 아니다. 거짓과 허세와 욕망과 사랑이 뒤엉켜 있다. 하나씩 조사할 때마다 낯선 요코의 모습이 보인다. 그 낯설음은 요코만의 것이 아니다. 미로 자신의 낯설음도 같이 드러난다. 이 과정을 작가는 건조하면서 사실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대단하고 매력적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사실 어느 정도 도식적이다. 친구가 사라지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건 전화가 미로라면 당연히 그녀가 의심받는다. 여기에 야쿠자가 개입하고, 남자 친구도 사라진 돈에 대해 결백하고, 사건 해결을 위한 시한이 정해져 있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런 도식적인 전개를 통해 긴장감을 불어넣고, 사건 해결 과정에서 만나고 드러나게 되는 사실들은 그녀만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게 만든다. 육체적으로 너무나도 무력한 그녀가 어떻게 감성과 상상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지 말이다. 

“중요한 건 이상하다고 느끼는 감성과 왜인가를 생각할 줄 아는 상상력이야.”(243쪽)란 아버지의 말은 중요한 순간에 그녀에게 영감을 준다. 평범해 보이는 사건의 이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이 바로 이 소설이 주는 또 다른 재미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구성 같은데 그 속에 담겨 있는 인간의 뒤틀리고 어두운 욕망과 악의 등이 그런 부분을 지운다. 가볍게 시작하여 무겁게 읽히지만 몰입도가 좋아 단숨에 읽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먼저 나온 <다크>를 다른 작품 출간 전에 읽을까 고민한다. 미로의 길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지와 그 어두운 길을 확인하고픈 마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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