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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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었다. 이 작가에 대해 잘 모를 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를 읽었다. 그때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이 책이 보이면 친구에게 추천하곤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의 많은 책이 절판되었고, 찾기가 쉽지 않았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로맹 가리의 이름이 보이면 사곤 했지만 무지했던 그 당시 에밀 아자르가 그인지는 몰랐다. 아마 그때 에밀 아자르로 출간된 책을 샀다면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작가도 많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낸 첫 번째 소설이다.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것으로 유명한 그이지만 <자기 앞의 생>에 나온 글을 읽다보면 작가에 대한 선입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선입견을 벗어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무명의 젊은 작가 에밀 아자르다. 그의 새 이름과 작품은 출판사에 호응을 받지만 약간의 편집을 요청받는다. 아마 로맹 가리로 출판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거장과 신인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그리고 이 편집된 부분이 이번 책에 실려 있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개인적으로 편집자들의 선택이 더 읽기 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로칼랭은 쿠쟁 씨가 키우는 비단뱀의 이름이다. 그로칼랭이란 이름은 열렬한 포옹이란 뜻이다. 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쿠쟁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들어줄 존재다. 2미터 20센티의 비단뱀이 쿠쟁의 몸을 감을 때 느낀 편안함과 동질감은 외로움에 지친 그를 편안한 휴식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그로칼랭만 그런 것이 아니다. 비단뱀의 먹이로 산 생쥐에게도 그의 감정은 이입된다. 이 감정은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속에 집착도 담겨 있다. 자신의 감정에 몰입하고 타인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행동에서 그것은 잘 드러난다. 그런 행동은 두려움과 공포가 바닥에 깔려 있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껍질 속에서도 불편해 하는 것은 그 껍질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18쪽)란 문장은 비단뱀이 탈피를 하여도 비단뱀인 것에 반해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편한 다른 껍질을 뒤집어 쓴 채로 살아야 하는 현실을 말한다. 이것은 쿠쟁 씨가 회사에 나가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나 나중에 그가 결혼을 꿈꾸었던 드레퓌스 씨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겉과 속이 다른 삶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서른일곱에 혼자 사는 그가 창녀를 찾아가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분명히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서겠지만 다른 하나는 그의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줄 조그마한 신체접촉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로칼랭처럼 안아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행위를 갈망하는 것은 그의 외로움이 얼마나 심한지 알려준다. 그리고 공권력이나 타인에 의한 폭력을 상당히 두려워하는데 이것은 사환의 초대와 맞물려 드러난다. 초판본과 복원판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 중 하나가 이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읽기 편한 것은 초판본이지만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알기는 분명히 복원판이 좋다.

비단뱀 그로칼랭에 대한 글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현대인의 삶과 외로움을 담고 있다. 점점 기계화되고 산업화되면서 우린 서로가 신체접촉할 일이 줄어들고 고독을 느낀다. 이것이 극대화된 것이 생태학적 결말에서 그로칼랭과 자신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부분이다. 앞부분과 달라진 분위기 탓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지만 몇 번이고 펼쳐 읽게 만든다. 그래도 어렵다. 아마 이런 이유로 편집자들이 삭제를 요구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초판본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면서 에밀 아자르이자 로맹 가리인 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아직 내가 정확하게 발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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