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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이야기 ㅣ 작가의 발견 3
김보영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작가의 초기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읽었고, 뒤에 쓴 글을 모은 <진화신화>보다 더 취향에 맞다. 이 단편집의 반은 이미 <누군가를 만났어>에서 읽은 것이지만 다시 읽었다.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놓친 부분이나 그때 단편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새롭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이 단편집에서 SF 거장들의 작품 흔적을 발견한 동시에 그녀의 대단함과 성장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초기작 같은 작품이 계속 나왔으면 하는데 현재 쓰고 있다는 장편은 어떨지 모르겠다.
여섯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첫 작품인 <촉각의 경험>에서 이전에 아주 흥분하면서 읽었던 중편 <미래로 가는 사람들> 시리즈까지 초기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미래로 가는 사람들>에서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가 떠오른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바탕을 둔 시간여행과 문명의 발전 때문이다. 마지막 <합>편은 <유년기의 끝>이 연상되었다. 하지만 이런 연상은 단순히 흔적일 뿐이다. 그녀는 시간여행자를 내세워 좀더 깊은 사유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우주와 인간의 삶을 상상이상의 것으로 확대했다. 개인적으로 한국SF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다.
<다섯 번째 감각>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의 오마주 같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이 책이 사라진 세계를 다루었다면 김보영은 소리가 사라진 세계를 창조했다. 책이 모두 불탄 세계에서 사람들이 외워서 책을 전한 것처럼 이 단편에서 소리가 사라진 곳에서 그 소리를 듣고 말하는 사람들을 등장시켰다. 처음엔 육감보다 낮은 숫자에 혼란이 왔지만 읽으면서 그 낯선 세계에 점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소리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면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초능력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처녀작 <촉각의 경험>은 클론을 등장시키고, 그의 꿈을 알고 싶어 하는 클론 주인의 욕망을 다룬다. 이 욕망이 클론과의 교류를 통해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오는데 인간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각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그녀의 전공이 작품 전반에 잘 살아 있다. <우수한 유전자>는 반전을 품고 있지만 입장에 따라 누가 더 행복한 지를 묻는다. 세상에서 행복 만족도가 가장 높다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종의 기원> 연작은 독립적으로 읽어도 문제가 없겠지만 역시 앞의 이야기를 읽은 후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이 사라진 후 인간이 만든 로봇만 살아남은 미래를 다룬다. 이들이 이룩한 세계는 너무나도 인간과 닮아 있다. 그들의 창조신화는 성경의 또 다른 버전이고, 이야기 속에서 다루는 창조론과 진화론은 현재에 대한 풍자이자 은유다. 교조적으로 변하고 도식화된 세계에서 새로운 학설과 인물의 등장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그대로 살아있고, 로봇의 행동 속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무비판적이고 무조건적인 숭배와 신앙을 그래도 재현하면서 강력하게 비판한다. 다음 이야기가 더 나왔으면 한다.
아직 나의 SF 내공이 부족하여 그녀의 작품을 해석한 사람들과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연상한 경우가 많다. 어쩌면 나의 오독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환상소설보다 하드SF 쪽에 더 많은 재능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원작이나 역사 속 한 이야기를 진화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