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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의 기사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작품이다. 시마다 소지가 79년에 처음으로 쓴 소설이지만 발표는 88년에 스물다섯 번째로 한 것이다. 작가가 유명해지기 전에 쓴 작품들이 나중에 다시 출간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이렇게 늦게 된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려 스물네 권이나 발표했다니 그것도 대단하다. 뒤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보면 두 번의 개정이 있었는데 어느 판본을 기준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저작권을 보면 첫 출판인 88년인데 97년에 다시 애장판이 나오면서 다시 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 작가 참 개정을 좋아한다.
책 뒷면에 미타라이와 이시오카의 첫 만남이란 문구가 있다. 탐정에 비해 나에게 이시오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놈의 저질 기억력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시선을 끈 것은 이시오카와의 첫 만남이 아니라 미타라이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었다는 독자의 평이다.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엄청난 데뷔를 한 이력을 생각하면 어떤 트릭이 있기에 이런 평가를 받았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독자의 평을 읽다보니 잘 짜인 트릭보다 감성적이란 단어가 더 눈에 들어온다. 이래저래 호기심을 자극한다.
첫 장면은 낯선 벤치 위다. 늦은 오후 눈을 뜬 그가 먼저 생각한 것은 차다. 어딘가 세워두었을 것 같은 차다, 그런데 없다. 여기서 기억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어디에 세워뒀을까? 에서 시작하여 결국 나는 누군가로 이어진다. 가야할 곳을 모른다. 방황한다. 그러다 한 여자가 보인다. 기시감대로 여자가 맞는다. 그가 길을 걷다 쓰러진다. 이 장면은 그와 료코의 첫 만남이다. 찻집에서 다시 깨어나지만 역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화장실 거울을 보면서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그렇게 그는 공포와 기억상실과 무력감 속에 서 있다. 이때 그를 부축한 료코에게 그녀 집으로 가자고 한다. 자신도 놀란다.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간다.
이 만남으로 이 둘은 그녀를 때린 기둥서방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같이 시작한다. 열아홉의 예쁘고 귀여운 그녀와의 동거가 시작한 것이다. 그의 꿈 일부가 실현된 것이다. 료코는 물장사를 벗어나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는 이력서가 필요 없는 공장에서 일한다. 행복한 나날이 이어진다. 이 일상에 변화가 온 것은 전철에서 본 하나의 간판이다. 미타라이 점성술 간판이다. 몇 번을 그냥 지나가다 전날 부장과 술 마시고 다른 사람과 싸운 뒤라 그런지 왠지 끌린다. 한자의 음독을 제대로 몰라 고민을 하다 안으로 들어간다. 이름을 말한다. 역시 잘못된 발음이다. 이렇게 명탐정 미타라이와 만난다. 물론 이때는 그가 명탐정이라고도 될 것도 예상하지 못한 시기다.
아마 미타라이 시리즈에서 팬들이 선정한 1위가 된 것도 이 만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젊은 이십대의 미타라이 모습은 새롭고 신선하다. 언제나 탁월한 추리와 판단력과 기행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난다. 인간적이고 재미있고 때로는 우스운 모습으로 말이다. 이 둘의 만남이 많아짐에 따라 그의 삶도 조금 변한다. 세상에 료코 외에 아무도 친한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친구가 생겼다. 일상의 변화는 료코를 자극한다. 그러다 발견한 한 장의 운전면허증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를 몰아간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엄청난 음모와 계략은 그를 파멸로 몰아간다.
변함없이 잘 읽힌다. 기억을 잃은 그를 따라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중반에 그의 과거가 드러나는 부분에선 이상한 느낌이 들지만 놀랍다. 밝혀지는 사실과 이어지는 행동은 속도감을 더한다. 그리고 밝혀지는 진실은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낳는다. 작가의 경험이 만들어낸 상황에서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으론 인간 이성이 마비되었을 경우를 생각하면서 일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충분히 납득하지는 못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쿄고쿠 나츠히코의 <백귀야행>이다. 고서점 주인인 교고쿠도와 세키구치의 만남이 생각났다. 가끔 점성술사 미타라이와 고서점 주인이자 괴담 전문가 교고쿠도가 헷갈린다. 장광설이야 교고쿠도가 더 심하지만 미타라이가 트릭을 밝혀내고 진상을 설명할 때도 역시 만만치 않다. 또 이 둘과 연결된 세키구치와 이시오카도 그런 부분에 일조한다. 뭐 이런 설정은 홈즈에서부터 시작한 것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