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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체들의 연애
어맨더 필리파치 지음, 이주연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욕망이 없다면 어떨까? 종교에선 이런 상태를 최고의 선으로 칠지 모르지만 일상 삶에선 다르다. 욕망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이 환희나 즐거움이나 평정심이 아니고 공허감과 상실감과 무심함 등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사는 재미가 없다. 누구나 조그마한 취미생활이나 좋아하는 일 하나 정도를 가지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욕망을 통해 삶에 활기를 불어넣으란 의미다. 그런데 린은 어느 날 갑가기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린을 스토킹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앨런이다. 이 스토커에게 무서움이나 다른 나쁜 감정을 느껴야 하는데 오히려 그녀는 그를 부러워한다. 그래서 그처럼 스토커가 된다. 그런데 그녀는 스토킹에 큰 관심이 없다. 단지 욕망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한 남자를 스토킹한다. 그 남자가 롤랑이다. 앨런은 린을 스토킹하고, 린은 롤랑을 스토킹한다. 이런 재미난 관계는 앨런이 롤랑과 함께 의도적으로 운동과 대화를 하면서 묘하게 변한다. 스토킹를 하기로 했지만 귀찮은 린은 앨런의 스토킹 자료를 그대로 전달하면서 롤랑을 스토킹한다. 욕망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그녀이다 보니 이것도 참 힘든 일이다. 만약 그녀의 직원 퍼트리샤가 없었다면 이마저도 중단했을 것이다.
단순히 스토킹의 연속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이 묘한 관계가 처음에 이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앨런의 얕은 꾀 때문에 깨어진다. 대충 스토킹하던 그녀와 그녀에 무관심했던 롤랑이 함께 여행을 가고, 이 여행 속에서 생긴 우연한 일로 연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한 번 튀어 오른다. 사랑하던 린을 빼앗긴 앨런이 자살을 생각하고, 방황을 하던 중 여러 모임에 가입하고 스토킹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린과 롤랑의 관계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여기서 작가는 한 번 더 이야기를 변화시킨다. 새로운 사랑으로 매력적으로 변한 앨런을 린이 스토킹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세 남녀를 서로 엮고 뒤섞으면서 이야기를 여러 번 변화시킨다. 관계가 변하고, 각자의 숨겨진 습관들이 드러나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변화를 준다. 그리고 전직 정신과의사였던 홈리스 레이를 관찰자에서 개입자로 변경시키면서 약간 늘어진 듯한 이 셋의 관계에 긴장감과 신선함을 불어넣는다. 괴팍하고 노골적인 이 셋은 새로운 연인을 만나지만 이 또한 다음에 벌어질 황당한 이야기를 위한 하나의 소재일 뿐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직설적이고 노골적이고 파격적이고 뒤틀린 관계와 사랑을 담고 있다.
사실 이 소설의 재미는 초반과 마지막에 집중되어 있다. 괴이한 설정과 만남을 다룬 초반에 웃음을 주면서 이 괴팍한 세 명을 즐겼다면 마지막엔 예상하지 못한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이 작가가 얼마나 섬뜩한 유머를 풀어놓았는지 알게 된다. 욕망하고자 하는 마음과 욕망을 충돌시키고, 믿음을 배신으로 이어가고, 사랑을 일상에서 떼어냄으로서 단 하나의 겉치레도 없이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이 비현실적인 세 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읽는 사람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그들 속에 설핏 보이는 나의 욕망은 결코 거짓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