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 톰스 캐빈 아셰트클래식 2
해리엣 비처 스토 지음, 크리스티앙 하인리히 그림, 마도경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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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청소년용으로 편집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당시 마지막에 톰 아저씨와 조지가 만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이런 기억은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약간은 과장된 평가와 함께 뇌리 속에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확한 실체는 없었다. 오히려 노예와 관련된 것이라면 쿤타 킨테로 대변되는 <뿌리>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읽지 않은 소설보다 어릴 때 본 미국 드라마의 이미지가 더 강렬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 기억하는 쿤타 킨테는 톰 아저씨와 다른 유형의 노예다. 톰 아저씨가 좋은 주인 밑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면 쿤타 킨테는 자유를 찾아 늘 탈출을 꿈꾼다. 물론 톰도 자유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자유는 자신의 능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은혜를 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선량한 주인 세인트클레어가 딸과의 약속 때문에 그를 해방노예로 만들려고 한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이 약속이 불의의 사고로 지켜지지 않았을 때 여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만 이것은 소극적인 대응일 뿐이다. 그를 노예로 생각하고 하나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녀가 이것을 용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쿤타 킨테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자유를 위해 수많은 탈출을 시도한다. 어쩌면 이 소설 속 조지에 조금 더 가까울 것이다. 조지는 탁월한 능력으로 공장에서 기계를 만들고 고용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그러자 이를 질투한 주인이 그를 학대한다. 이 때문에 탈출을 시도한다. 이 부분은 이 둘이 다른 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지워진 굴레를 적극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조지와 그의 아내 엘리자가 초반에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데 이것은 톰의 행동과 상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엘리자도 역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아이가 팔린다는 소식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것과 톰이 현세보다 내세를 더 믿었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았다는 것은 그 시대 기독교 내부의 상반된 견해를 보여준다. 이 둘은 모두 같은 주인 밑에서 살았다. 하지만 자신이 팔려간다는 소식에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한 명은 아이를 위해 달아나고, 한 명은 주인을 위해 팔려간다.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을 벗어나려고 한 그녀와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움직인 그를 보면 역사를 움직인 것은 바로 엘리자나 조지 같은 행동가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현재의 시각에서 톰의 위치가 조금 못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악덕 주인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종교의 힘만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면 평안한 생활이 보장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그가 주인이 준 통행증으로 충분히 달아날 수 있었는데도 그 피해가 주인과 가족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도망가지 않은 것과 맞물려 있다. 그가 얼마나 자유를 갈망했는지 보여준 장면에서 약간 의외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그리고 이것은 그 시대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만약 도망자인 톰을 그려내었다면 현재의 쿤타 킨테처럼 그 시대에 많은 동조와 호응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대출 알고 있던 것이지만 세부적인 이야기나 전체적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은 새롭다. 단순히 모든 노예가 학대받았다거나 주인공이 노예를 학대했다거나 하는 인식을 산산조각 낸다. 그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살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장면에선 가슴이 아린다. 약 150년 전 한 지주의 입을 통해 노예제도의 문제와 한계를 말할 때는 그 시대도 이미 어느 정도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음에 놀란다. 하지만 노예해방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얼마나 많은 인종차별이 존재했는지 알고 나면 이것이 단지 큰 발전을 위한 한 걸음이었음을 알려준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쉽고 빠르게 읽힌다. 특히 관심이 가는 장면들은 두 번째 주인인 세인트클레어 집에 머물 당시에 있다. 그가 풀어내는 노예제도의 모순과 그 시대의 한계와 문제점이 현재에도 유효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바가 보여준 놀라운 믿음과 영향력은 한 편의 종교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국이 법으로 노예를 해방했지만 최근까지 그들을 결코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역사를 생각하고, 전통적 의미의 노예대신 급여의 노예가 되어 고용주의 말에 휘둘리는 현대인을 보면 흑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해방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사족처럼 몇 가지 덧붙인다면 삽화와 더불어 진행되는 노예매매와 탈출의 현장은 그 시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어떻게 노예가 만들어지고 팔리고 학대받고 탈출하고 죽는지 알게 된다. 삽화만 보아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불만은 번역에서 시대를 넘어선 표현이 드러난 곳이 보이는 것이다. 특히 영화와 관련된 문장이 나올 때는 번역상의 실수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가끔 매끄럽지 않은 곳이 나타나 흐름을 흩트리는데 멋진 작품 속 옥의 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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