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라우라 레스트레포 지음, 유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더 힘들게 읽었다. 작가가 말했듯이 바깥 세계와 내면 세계를 동시에 반영하기 위해 일반적인 문법과 서술규칙을 모조리 무시한다. 네 명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일인칭과 삼인칭이 왔다 갔다 한다. 서술과 독백과 대화가 과거와 현재 시제와 뒤섞여 있다. 대단한 집중력과 세심하게 읽지 않으면 그 재미를 놓치기 십상이다. 사라마구와 마르케스의 칭찬을 제대로 누리기가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한 명을 꼽으라면 아구스티나다. 그녀의 남편 아길라르나 과거의 연인 미다스나 외할아버지 포르툴리누스는 별개의 이야기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와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목처럼 광기를 보여주는 개인은 아구스티나이고, 사회의 광기를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미다스다. 이 둘을 통해 내면의 황폐화된 모습과 시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그려낸다.   

 

 아구스티나의 집은 부자다. 그녀는 물질적 결핍을 모르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녀의 늦은 귀가와 남자 친구에 대한 아버지의 근심과 걱정은 막내인 비치에게 옮겨가면 폭력으로 발전한다. 아들이 보여주는 여성 같은 행동과 말투가 그로 하여금 폭력을 휘두르게 한다. 아버지와 소피 이모 사이의 불륜을 알고도 덮어둔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 가족이 보여주는 연극은 허위와 거짓으로 가득하다. 그녀가 광기에 휩싸이고, 폭발하는 장면들이 그 연원을 올라가면 이 상황에 있음을 알게 되고, 다른 이야기 속에서는 가족력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아길라르는 대학교수였다. 아내를 위해 교수직을 포기하고, 사료 배달을 한다. 물론 교수직을 포기하기 전 학교가 잠시 문은 닫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를 돌볼 시간을 더 갖기엔 사료 배달이 더 좋다. 아갈라르는 그녀의 광기를 직접 몸으로 마음으로 받아낸다. 사랑으로 가득한 그는 이 속에서 아구스티나 가족의 역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모든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고, 발전했고, 어디로 갈 것인지 고민하고 질문한다. 인상적인 장면은 전처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느낀 편안함과 이 편안함에 취해 있을 때 나타난 아구스티나의 관심이다. 이 관심으로 사랑이 충만하고, 그녀의 광기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 세탁을 하는 미다스는 부패와 폭력과 마약 거래와 살인 등의 사회적 현실을 말한다. 가난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가 아구스티나의 오빠 호아코를 만나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순수하고 순진했던 그는 돈의 위력을 알고, 호아코의 행동과 말을 흉내 낸다. 성장한 후 부자들과 마약상들의 돈을 세탁하고, 자신도 부를 쌓아간다. 나름대로 부를 이루고, 멋진 여자를 거느리지만 그가 가진 것은 아직 약한 기반위에 세운 모래성과 같다. 그 모래성은 그가 현실을 제대로 보고, 싸우지 않고 포기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그녀의 광기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알려면 외할아버지 포르툴리누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독일 이민자에 피아노 연주자였던 그의 현재와 과거를 보면 그녀의 행동이 단순히 개인적, 사회적 문제만이 아닌 유전적 요소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의 누나 일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듣는 순간 그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고, 그의 삶이 그것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알게 된다.  

 

 역자는 원작의 문장이 주는 난해함을 어느 정도 읽기 쉽게 풀어내었다. 그래도 익숙하지 않다. 절반 정도를 읽으면서 그 문장과 시제와 인칭 때문에 그 재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시간도 충분하지 않고 집중력은 약해졌다. 그런데 절반을 넘어 끝으로 가면서 앞에 나왔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속도가 붙고 힘겨웠던 문장들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재미도 있었다. 비록 거장들이 누린 재미를 온전히 누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언젠가 다시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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