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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바흐
로버트 슈나이더 지음, 강명순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아직 바흐의 매력에 대해 잘 모른다. 학창시절 라디오에서 나오는 클래식을 들으면서 낮잠을 즐겼던 기억은 있다. 나른한 아침의 햇살 속으로 울려 퍼지는 클래식의 선율은 졸음을 잠으로 이어가는데 최고였다. 그 이후도 음악회를 가면 존다. 나쁜 버릇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음악가의 작품을 소설 등에서 해석한 글을 읽거나 우연히 듣게 된 선율은 CD를 구입하게 만든다. 몇 번을 듣지만 유명한 몇 곡을 제외하면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나의 귀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음악가를 다룬 책이 나오면 눈이 먼저 간다. 이 소설은 바로 음악의 아버지라고 학창시절 배웠던 바흐의 유산을 둘러싼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구동독의 나움부르크다. 구동독이라고 표현한 것은 독일이 통일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움부르크 성 벤첼 교회의 오르간과 그곳에서 발견된 바흐의 유작을 둘러싸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성을 뒤섞어놓았다. 바흐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여주는 야곱과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아들을 욕하는 아버지와 자신의 첫사랑과 아버지의 결혼으로 태어난 이복동생 레오가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뒤틀린 묘한 애정을 보여준다면 교회의 오르간을 조사하러 온 저명한 바흐 협회의 회원들이 다른 한 축으로 야곱과 대립하고 속물근성을 드러내어준다. 명성의 허울 속에서 참모습을 꾀 뚫어 보여주면서 진정으로 바흐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려준다.
주인공 야곱은 특이하면서 불행하고 불안한 남자다. 첫사랑에게 차이고, 그 첫사랑이 자신의 계모가 되었고, 두 번째 사랑한 여자도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 이런 사랑의 실패와 껑충한 키에 굽은 모습은 다른 사람의 애정을 받기에 부족하다. 아니 그 무엇보다 자신감이 없는 그의 삶이 더 문제다. 솔직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술로 자신을 지탱하는 그의 모습은 지리멸렬한 삶 그 자체다. 이런 그에게도 한 가지 재능이 있다. 바흐에 대한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도시로 바흐 협회의 회장을 비롯한 거두들이 오르간을 조사하기 위해 온다. 야곱은 이미 이곳에서 수십 년 동안 무료로 연주를 하고 있다. 하지만 소위 거두니 전문가니 하는 사람들이 언제 아마추어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통일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냉소와 비웃음은 차가운 비수처럼 다가온다.
이야기는 야곱의 가정사와 애정사를 바탕으로 깔고 그의 바흐에 대한 충성과 우연히 발견하게 된 <요한계시록>이란 악보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교회의 오르간 조사위원회에 자신이 오랫동안 연주하고, 아마추어 바흐 연구자였던 것을 알리면서 위원으로 합류하고자 하였지만 정중하게 거절당한다. 이에 분개하던 중에 이복동생이 낀 곳에서 바흐의 유산처럼 보이는 물건을 발견한다. 분명 이것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불행하고 불안하고 위원회에 발탁되지 않은 감정들이 결합하여 이것을 숨긴다. 소설은 이 때부터 이 상황을 둘러싼 이야기로 맴돈다. 그리고 우연히 이 악보를 야곱이 머릿속으로 연주하면서 알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음산한 분위기를 경험한다.
사실 이 바흐의 유작만을 중심으로 나갔다면 속도감은 있었겠지만 풍성하면서 아슬아슬하고 미묘한 재미는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유품을 협회에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과 최초의 발견자이자 이 때문에 유명해진 자신을 상상하는 욕망에 휩싸인다. 또 짝사랑하는 여인이나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의 불안감과 욕망을 더욱 키운다.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가지 변함없는 것은 바흐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다. 이 감정들이 바로 그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의 가치를 깨닫게 만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흐 협회의 회장이나 조수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반면에 일본인 고야타케만 그 실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명성을 얻을 때까지의 업적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이후 그들에겐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 그 이상은 아닌 것 같다.
잘 읽히고 재미있다. 전작 <오르가니스트>에선 낯설고 더딘 진도였는데 이번에 그렇지 않았다. 전작도 역시 오르가니스트가 주인공(그것도 천재 연주자)이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혹 작가 자신이 연주자거나 아니면 이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것일까?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한다면 역시 눈으로 듣는 바흐의 음악일 것이다. 음악에 무지해서 충분히 형상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글로 만들어진 그 형상이 가슴으로 울려 퍼진 것은 사실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주인공이지만 연민과 자그마한 애정이 생기는 그의 행동과 삶이 바흐에 대한 삶과 이어져 즐거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