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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는 습관적으로 김탁환의 “따뜻한” 글쓰기 특강으로 읽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다시 그 제목을 보니 “따듯한”이다. 갱상도 남자의 따듯한 감성이 가득 묻어나는 책이다. 그의 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되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이 책을 구성하는 열여섯 강의는 그가 읽은 책들의 밑줄 긋기이자 밑줄 긋는 문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이 노력을 표현한 것이 바로 백년학생에 빗대어 만들어진 천년습작이란 단어에 이러게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순간의 번쩍이는 깨달음이나 지식의 나열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지독히 더디고 많은 공이 들어가는 노동이다. 단순히 하나의 간단한 이야기를 만든다고 하여도 그 속엔 작가가 걸어온 길에서 마주한 수많은 사람과 그 관계들이 현실과 상상의 그물을 자아내면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 없음을 말하는 대목과 발자크의 사례로 잘 나타내어준다. 발자크의 일생을 보면 현대 몇몇 작가들이 글쓰기를 직장인들의 일과처럼 고된 노동으로 이어가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열여섯 강의를 읽으면서 많은 책들이 각 강의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그가 밑줄 긋기를 통해 책과의 대화를 한 결과물이자 자신의 삶과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이 책들 중 읽지 않은 책들이 상당히 있다. 그리고 이전에 읽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책도 있다. 이런 책들은 그의 강의를 통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읽지 않은 책은 읽고 싶어지고, 이해하지 못한 책은 시간내어 다시 도전해야겠다는 의지를 불러왔다. 그가 인용한 문장들이 그 당시 나에겐 전혀 울림이 되지 않은 경우는 그와 나의 차이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어떻게 해야 좋은 글을 쓰고 멋진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266쪽)를 쓴 책이다. 다른 책이나 영화나 자신의 책을 인용한 것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한 조그마한 수단이다. 하지만 눈의 높이가 낮은 나 같은 사람에겐 숲보다 나무에 더 눈길이 간다. 그 한 그루 한 그루를 보면서 작가와 작품을 새롭게 보게 되고,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가 말한 천년습작은커녕 백년학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저자처럼 처음 몇 장을 읽을 때는 인상적인 문장 몇 곳을 표시해두었다. 나 자신도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글쓰기의 매혹과 글읽기의 매혹이 다른 까닭”(29쪽)이란 표현을 읽는 순간 아직 글쓰기의 매혹에 빠지지 않은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학창시절 일기를 몇 년 동안 쓰면서 약간의 발전이 있었을지 모르고, 한 편의 멋진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책읽기의 매혹에 빠진 내가 쉽게 이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다. 아니 정확히는 첫 문장을 시작하는 순간 막혔고, 그 뒤로 그 막힘을 뚫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간 내가 글을 쓰는 경우는 리뷰를 쓸 때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이것도 점점 게을러지고 있다. 그리고 가끔 머릿속을 지나가는 기발한 생각이나 멋진 문장들은 손으로 옮겨가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은 문장이나 아이디어도 머릿속에 힘겹게 담고 집에 와서 손으로 옮기는 순간 그 첫 영감이나 생각들이나 문장은 뒤틀리고, 바뀌어버린다. 이러니 아직 백년학생 초입단계에 머물러있다. 또 서평에 대한 그의 경험이나 글쓰기에 대한 인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보다 먼저 걸어가 그의 길에 나의 흔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글쓰기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 그 자세의 일부를 배웠을 뿐이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