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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거의 모든 글이 편지나 쪽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근 500쪽에 달하는 소설을 재미있게 끌고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앞부분에 조금 적응기를 거치고 나면 재미나고 즐거운 등장인물들 때문에 그냥 빨려 들어간다. 소설 속 중심인물인 줄리엣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하고 진솔한 감정과 에피소드들은 화려하지도 긴장감을 심어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요즘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감성과 감정들로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고, 전쟁이란 비극 속에 벌어진 안타깝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가슴이 먹먹하고, 머릿속으론 각각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건지 섬의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작가 메리 앤 셰퍼의 첫 작품이자 유작이란 것도 있지만 언젠가 책을 쓰기를 원했던 그녀에게 “닥치고, 글을 쓰라고!” 란 친구의 말에 자극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는 것과 건지 섬에 가서 안개 때문에 공항에 발이 묶이면서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이 섬에 대한 자료를 읽고 매혹되어 글을 썼다는 사실이다. 친구의 말 한 마디와 안개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린 건지 섬과 그 섬에 사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분명 우리의 행운이다.
줄리엣이 한 통의 편지를 도시에게서 받으면서 건지 섬 사람들과의 인연이 시작한다. 시대적 배경은 전후 1년이 지난 1946년이다. 줄리엣은 몇 년 간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에서 예상하지 못한 칼럼 모음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름을 알린다. 우연히 그녀의 이름과 주소가 있는 책을 산 도시가 그녀에게 찰스 램에 대해 알고 싶어 편지를 쓴다. 이 한 통의 편지는 앞으로 펼쳐질 재미나고 감동적이며 가슴 아프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의 시발점이다.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곧 건지 섬에서 일어난 문학 동호회 감자껍질파이 클럽 탄생 비화로 이어지고, 이것은 곧 클럽 회원들의 편지로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된다. 하나는 줄리엣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야기고, 다른 것은 건지 섬에 있었던 과거다. 예상하지 못한 책의 성공과 그녀의 로맨스가 한 축을 이루면서 새로운 글에 대한 고민과 친구 오빠이자 출판사 대표인 시드니와의 편지 왕래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잘 나타내준다. 반면에 건지 섬 클럽회원과의 편지 왕래는 전쟁 때 있었던 어려움과 안타깝고 애절한 사연들이 잘 살아있다. 그 중에서도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활기차면서도 사랑스럽고 즐겁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가슴이 아릿아릿하다.
도시의 믿음직한 행동이나 아멜리아의 따스한 마음씨나 이솔라의 활기차고 덤벙거리는 모습들은 각각의 매력으로 즐겁게 만들어준다. 가끔 나오는 독일군과의 에피소드는 독일인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가 아닌 가슴 따뜻하고 인정 많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독일군에서 자행한 수많은 악행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에 휩싸이게 한다. 전쟁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 서로 고생한 사연에선 점령자와 피점령자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건지 섬 주민들의 독일에 대한 반응도 집단과 개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즐겁고 유쾌하고 재미있다. 가슴 따뜻하고 유머 넘치고 위트 있는 단어 사용은 읽는 순간 미소를 짓게 만든다. 역사 속에서 전체나 개인에게 일어난 비극적 사건들은 너무 큰 충격이고 아픔이다. 그 와중에도 웃음을 짓고, 서로를 격려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그들을 보면 인간이 지닌 힘을 느끼게 한다. 또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풍기는 영국 여성작가들의 향기는 읽는 내내 가슴으로 스며든다. 책이 없어, 혹은 좋아서 몇 권의 책만 반복해서 읽는 그들을 보면 다독으로 책장을 채우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건지 섬, 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 그 섬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 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