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해즈빈
아사히나 아스카 지음, 오유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제목을 처음 보곤 커피 빈을 연상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빈이란 이름에서 장소를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영어의 has been 현재완료형을 뜻한다. has-been으로 표기하면 한창 때가 지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의 사람을 일컫는다. 갑자기 왠 영어 단어냐고? 바로 이 소설 속 주인공인 리리코의 현재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많은 분량의 소설이 아니다.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결코 밝은 소설도 아니다. 리리코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도쿄 대학을 나와서 같은 대학 출신의 변호사 남편과 좋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밖에서 보기엔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녀는 의욕도 활기도 없다.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실업급여 때문에 고용안정센터에 나가고, 구직활동을 정열적으로 하지 않지만 하나씩 자료를 모은다. 이런 그녀의 일상을 보여주는 앞부분은 읽다 보면 화가 난다. 뭐가 부족해서 저렇게 날카롭고, 투정을 부리며, 예민한 것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뒤로 가면서 연민으로 변하게 된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구마자와의 만남은 그 변화의 시발점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학원에서 늘 톱을 놓치지 않던 아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이사를 가면서 그 소식이 끊겼는데 취업세미나에서 우연히 만난다. 아이 때 늘 일등을 하여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가 10살은 더 늙은 모습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만남으로 그녀의 성장과정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사립학교 열풍이 강하지 않던 시절, 사립학교 입학 학원에서 최하위반에서 최상위반으로 올라가기 위한 노력과 열정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는 부모의 자랑이 된다. 거기에 대학도 도쿄대학을 나왔고, 세계적인 대기업에서 일했으니 얼핏 보기에 멋진 조건을 갖추었다. 또 남편은 변호사고, 시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며, 시어머니도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가는 종이 공예가다. 이런 외양은 오히려 삶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짐처럼 다가온다.   

 

 소설의 대부분은 그녀의 짜증과 열등감과 날카롭고 예민한 심리와 행동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후반으로 가면서 진실한 그녀의 삶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바뀐다. 결혼하기 전 남편에게 보여주기가 그렇게 부끄러웠던 집이 아버지의 간병을 위해 간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학원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얻었고, 시험이라면 어려움 없이 합격한 그녀의 힘겨웠던 과거도 나오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학창시절이나 입사시험에서 탁월함을 보여준 그녀가 어느 순간 적응장애를 겪으면서 총아에서 짐으로 전락한다. 세상사가 시험처럼 직선으로 흘러간다면 그녀는 분명 더 높고, 더 큰 성취를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냉혹하고 살벌하면서 살아 움직이며 순발력과 유화능력이 필요한 세계에 적응을 실패한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그녀의 이때까지 성공이 마지막 순간에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설에서 가장 가슴으로 파고드는 장면은 책 뒷장에 나오는 대사다. 늘 바르고 자신감 차 있던 그녀가 밥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강요하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변한다. 자신을 둘러싸고 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을 깨트린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알 수 없다. 그 순간을 영원하게 끌고 가는 아주 힘든 싸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웃음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그녀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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