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수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1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 인생을 책으로 엮으면 끝도 없어.” 백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이러니 천 년을 산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이 소설의 배경이자 이야기의 시작점인 녹나무는 그 긴 세월만큼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 사연들을 과거와 현재를 적절히 섞어 다양한 분위를 연출하면서 펼쳐 보여준다.   

 

 모두 8편의 이야기가 있다. <맹아>에서 <낙지>로 이어지는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 특정한 지역과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사연들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왕따를 당하던 한 소년에겐 자살을 생각하게 만들고,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해 오지 않을 그를 기다리고, 친구에게 전해줄 츄잉 껌을 병에 담아 타임캡슐처럼 전달하고,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장소가 되고, 조폭이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먹고, 재혼한 부부의 새로운 사랑이 확인되고, 생각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연애가 벌어진 추억이 있다. 이 이야기 하나 하나가 과거의 사연들과 맞물려 펼쳐지면서 시선을 사로잡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보통 고령의 나무 밑은 사람들의 휴식처가 대부분이다. 그 크기가 크면 클수록 우린 사연을 만들고, 그곳을 즐기고, 추억하게 된다. 하지만 이 거대하고 오래된 녹나무는 다르다. 이 나무에 얽힌 사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이들의 실종이다. 괴담처럼 퍼진 이 이야기는 소설 전체를 휘감아 돌면서 지속적으로 괴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상한 어린 아이가 나타나 자살을 충돌질하고, 거울 속에선 한 젊은 여자가 말을 건다. 나무의 우듬지엔 누군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불쑥 나타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지만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강하게 연관성을 드러내지 않지만 지나가듯이 사연들을 말하면서 나아간다. 전체적으로 밋밋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지막 한 문장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긴장감을 가지고 읽다 그 음울한 분위기에 빠지고, 조그마한 오해가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연애사는 빙그레 미소 짓게 한다. 이 과정을 작가는 결코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소설에서 긴 세월의 흔적을 맛보게 된다. 가끔 긴 세월을 다룬 소설 중 잘 된 작품들에서 만나게 되는 느낌이다. 

 

역자도 말했듯이 이번 소설은 그의 다른 작품과 분위기가 다르다. 아직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내가 읽은 작품과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밝고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고 재치 가득한 전작들에 비해 이번은 조금 어둡다. 그 시작을 여는 것이 바로 한 가족의 죽음이니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어둡고 무겁고 암울한 것은 아니다. 빠른 장면 전환과 상황 설정으로 이야기꾼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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