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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후회남
둥시 지음, 홍순도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둥시의 <언어 없는 생활>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만족감에 휩싸여 있다. 최근에 만난 중국작가들의 작품이 나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위화, 모옌을 지나 이제는 둥시도 읽고 싶은 작가군에 넣어야겠다. 90년대 초반 지극히 한정된 작가들만 만났는데 지금 새로운 작가들 작품이 번역되면서 선택의 폭을 점점 넓혀주고 있다. 기분 좋은 현상이다. 최근 일본 작가의 작품이 쏟아지면서 행복한 고민에 휩싸였는데 얼마 후에는 중국작가들 작품으로 이런 고민에 휩싸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조그마한 바람이다.
한 남자가 한 아가씨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문은 이야기체로 열지만 그 속은 소설의 문장으로 바뀐다. 이 전환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뒤로 가면서 광셴의 후회로 가득한 이야기 때문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된다. 15살 어린 시절 시작된 그의 후회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그 과정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과연 이렇게 불행한 인간이 있을까 하는 마음도 생기지만 작가는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30년에 이르는 긴 시간을 다루지만 좁은 공간 속에 벌어지는 몇 사람만의 이야기임을 생각하면 500쪽에 가까운 이 책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광셴의 집안은 자산가였다. 혁명으로 할아버지가 재산을 당에 납부하는 발 빠른 행동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그 자식들의 삶은 결코 풍족하지 않다. 뭐 그 당시 중국 전체가 부유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부모에게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10년 동안 성생활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집 앞에서 벌어진 개들의 교접은 아버지에게 성욕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그의 간청도 아내에겐 씨도 먹히지 않는다. 그러다 그는 자기 집의 하인이었던 여자와 섹스를 한다. 문제는 이 장면을 아들 광셴이 본 것이다. 그냥 광셴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이를 어머니에게, 그녀의 오빠에게 말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아버지는 당에 끌려가 혹독하게 처벌을 받고, 아버지와 헤어진 어머니는 다른 남자에게 추행을 당한다. 근데 이것을 또 광셴이 본다. 그녀는 자신이 먹이를 주던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 자살을 한다.
이렇게 시작된 광셴을 둘러싼 이야기는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다. 어린 시절 경험은 그를 사랑하던 여자의 열정에 저질이란 단어로 대답하고, 그런 그녀는 다른 남자와 정분에 빠진다. 그의 친구였던 자오징둥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소문을 그대로 전달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자오징둥이 사랑했던 장바오는 그를 열정에 휩싸이게 하고, 그 열정은 자신도 모르는 충동으로 그녀를 덮치게 만든다. 이 때문에 강간죄로 감옥에 들어간다. 감옥 속에서 탈옥을 시도하고, 동료를 고발하여 감형을 받지만 왕따를 당한다. 이 과정 모두 그의 말에서 비롯된 실수들이 가득하다. 감옥에 들어가면서 말을 줄이고, 행동을 느리게 하려고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이런 실수들은 반복된다. 이 반복은 단순히 말실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뒤로 가면 그의 삶을 지배하는 말실수와 더불어 그의 결단력 없는 행동이 더 많은 문제를 낳는다. 한 상황에서 주저하고,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그는 필연적으로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황당하고, 불쌍하고, 괴롭고, 불행한 인물이다.
소설 속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대단한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후회로 가득한 한 남자의 일생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엄청 풍부한 이야기와 재미를 담고 있다. 후회와 반복의 실수가 그를 불행으로 이끄는데도 눈을 뗄 수 없다. 시대가 바뀌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현실의 모습은 우리의 현대사를 떠올려준다. 90년대 이전 중국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이 최근 중국소설에서 많이 보이는데 이 소설도 그런 모습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혁명이란 이름 아래 경직되었던 이야기 구조가 풍자적이고, 유머 가득하고, 현실적으로 바뀌고 있다. 현실의 무거움을 사실주의로 가득 채워 힘겹게 그 현실을 받아들이게 했다면 이 소설은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의 남자를 등장시켜 재미나게 풀어내고 있다. 시대의 변화 위에서 힘겹게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춤추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춤이 비록 멋지고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입가에 미소를 계속 짓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