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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평점 :
제목만 본다면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철학이 도시를 디자인한다니 무슨 말일까? 도시를 철학적으로 지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궁리를 해도 되지만 표지에 그 답이 나온다. 20세기 비엔나에서 고대 아테네까지 유럽으로 떠나는 2500년 서양 철학 이야기! 라고. 그렇다. 이 소설은 철학사를 다룬다. 하지만 일반적인 서양철학사와는 다른 궤도를 달린다. 제목에 도시가 들어간 것처럼 각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이 거주했던 도시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그들의 저작과 삶을 이야기하면서 철학을 풀어낸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양 현대 철학에서 시작하여 서양 근대 철학을 거쳐 서양 고대 철학 및 중세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다. 일반적 철학사가 고대에서 현대로 오는 것과 반대 방식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신선하다. 낯익은 철학자들과 그들이 머문 도시를 함께 여행하는 즐거움을 주는 것도 하나의 매력이다. 그 열두 곳의 도시들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게 되었다. 이전엔 하나의 여행지나 명소였다면 이젠 한 철학자와 그의 철학을 음미하고 되돌아보는 공간이 된 것이다.
사실 철학은 쉽고도 어렵다. 어려운 것은 난해한 단어와 개념들을 복잡하게 설명한 덕분이고, 쉬운 것은 그 어려운 것들을 무시하고 생각하는 힘으로 접근하는 경우다. 여기서 멈추자. 좀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나의 무지가 드러난다. 꾸준히 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예전에 한 공부도 순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처럼 철학사를 다룬 책을 만나면 옛 기억을 되살리면서 새롭게 철학을 되돌아보고, 공부하는 기회를 가진다.
각 도시를 돌면서 만나게 되는 철학자들은 낯익고 반갑다. 그들 모두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다. 약간 낯선 비엔나 서클을 지나 비트겐슈타인, 데카르트, 스피노자, 존 로크, 데이비트 흄,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를 거쳐 소크라테스까지 오면서 긴 철학사를 여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도시들은 단순히 과거의 공간이 아닌 철학자들에게 삶과 영감을 준 곳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무수한 이야기는 철학사뿐만 아니라 철학자에 대한 풍부한 지식도 전해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저자도 말했듯이 칸트와 헤겔의 장이다. 학창시절 그들의 저서를 읽거나 강의를 들었지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을 생각하면 다시 읽어도 쉽지 않다. 얼마 전 소설 <세상을 삼킨 책>에서 칸트를 다루고 있었는데 그의 난해한 책을 생각하면 그 작가가 오히려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한 학기 동안 몇 쪽을 가지고 강의가 이루어 진 것만 기억난다. 헤겔의 철학에서 갈라진 수많은 유산은 이미 여기저기에서 본 것이라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다시 이렇게 만나니 가슴속에서 언젠가 다시 도전해야지 하는 의욕이 불타기는 한다.
이 책에 대해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책의 매력은 각 장마다 만나게 되는 철학자와 그가 살던 도시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새롭게 인식하게 된 1968년 파리의 모습이다. 얼마 전 40주년을 맞이한 것은 알았지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그것이 단순히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 현상이었음 알게 되었다. 덕분에 1968년을 다룬 책에 관심이 간다. 조금 횡설수설했다. 이 책의 목적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문장으로 마무리하자. “‘지금’ 그리고 ‘여기’, 그리고 ‘우리’를 알기 위한 것이다.” 수많은 도시와 철학자의 이론은 바로 이 문장을 알기 위한 여행이다.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지금, 여기, 우리를 알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