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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달파 1
모옌 지음, 이욱연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천 쪽이 넘는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언제 다 읽을까 걱정되었다. 이전에 그의 다른 작품을 조금 힘겹게 읽은 기억이 있기에 이런 마음은 더욱 강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는 그것이 기우였다. 전보다 훨씬 구수하고 몰입도가 높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면서 중국 현대사를 녹여내는데 어느 순간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의 입심이 최고조에 달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책에서 이미 경험했기에 읽기 부담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재미는 대단하다.
이야기는 1950년 1월 1일에 시작한다. 그 장소가 놀랍게도 지옥이다. 화자 중 한 명이 서문뇨는 악덕지주로 몰려 총살당해 지옥에 온 것이다. 그는 원한을 품고, 결코 자신이 나쁘지 않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그를 보면서 염라대왕은 인간세상으로 내려 보낸다. 그런데 환생한 것이 나귀다. 이 환생은 다시 소, 돼지, 개, 원숭이를 거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인과관계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50년이다. 이 시절을 거치면서 만나게 되는 삶은 많이 느끼고, 깨닫고, 고민하고, 감탄하고, 감동을 준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는 둘이다. 하나는 짐승으로 환생하는 서문뇨이자 남천세이고, 다른 한 명은 남해방이다. 동물인 서문뇨가 반쯤 의인화되어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묘사한다면 남해방은 인간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지만 이 둘은 모두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삶의 여러 질곡에 부딪힌다. 서문뇨는 동물로 환생을 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잊는 약을 마시지만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 기억도 윤회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지워지는데 그에 따른 그의 행동과 생각이 변한다. 나귀였을 때와 개로 태어났을 때를 비교하면 엄청나게 바뀌어있다. 이 변화는 그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로 욕하고, 미워하고, 원한을 가지다가도 시간과 세태의 변화 속에 다시 새롭게 관계가 정립되는 과정은 흔히 말하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나 복수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읽으면서 삶은 이런 식으로도 흘러가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50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이 시간 속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강한 인연의 고리 속에 묶여있다. 그 정점에는 서문뇨라는 지주가 있다. 그의 자식과 아내들의 다른 자식들이 시대 속에 다른 사람들과 만나 엮이고 충돌하고 이해하고 욕하고 사랑하고 성장하고 몰락하는 과정이 보인다. 어떤 때는 너무 심하다 생각이 들고, 어느 순간은 어떻게 저렇게 다시 웃으면서 지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 이 모든 사람들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다면 유일하게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 그가 바로 남검이다. 그의 존재는 처음엔 강하게 나오다 뒤로 가면서 비중이 줄어든다. 하지만 존재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그를 괴롭힌 수많은 고난과 방해가 있었지만 대지 깊숙이 내린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이런 삶이 다른 사람들의 심한 굴곡과 변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 재미난 이야기가 많은데 드러난 몇 가지만 말하자. 그 중 하나는 남검의 자손들의 이름이 중국 역사의 흐름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의 아들이 해방이고, 손자가 개방이다. 2000년에 태어난 증손자는 천세(千歲)다. 시대의 변화를 나타내는 단순한 이름이지만 강하게 다가온다. 다른 하나는 서문뇨가 환생한 동물들이 보여주는 기묘한 행동과 능력들이다. 그의 활약을 볼 때면 한 편의 판타지를 읽는 느낌마저 든다.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이 활짝 피어났다. 빠져들어 읽다보면 지겨움을 잊고, 전철에서 내릴 곳을 지나칠 정도다. 너무나도 방대하고, 풍부하면서 재미있어 작가가 보여준 것의 일부 밖에 표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