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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이언 매큐언 지음, 이민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언 매큐언에게 반하게 된 것은 두 편의 소설 때문이다. 문학상에 혹하지만 좀처럼 재미있게 읽지 못하던 나에게 <암스테르담>은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읽은 <속죄>는 이 작가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런 감정은 작가의 책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올 때면 언제나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점점 읽고 싶어지는 작가가 늘어남에 따라 기억 속에만 남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하루키의 소설도, 에코의 신간도, 미야베 미유키의 새 번역도 그렇다.
토요일.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이다. <일요일들>이란 일본 소설 때문에 한 동안 토요일들이란 잘못된 제목으로 기억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왜 나 자신이 "들"이란 단어를 붙였는지 모르지만 작가의 다른 책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문장은 단문이 아니다. 긴 호흡의 문장으로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는데 쉼표가 긴 호흡의 흐름을 잠시 쉬게 만들면서 그가 풀어내는 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 일인칭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하루 동안의 이야기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시간과 공간을 확장한다. 이 시간의 넘나듦은 작가가 잠에서 깨면서 마주하는 현실을 배경으로 끝까지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가 눈을 뜬 새벽, 한 대의 비행기가 추락한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그 사고를 본 것이다. 새벽의 어스름이 채 물러나지도 않은 시간이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내려왔을 때 나온 뉴스에 아직 속보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사건과 더불어 그를 하루 종일 사로잡는 행사 하나가 있다. 바로 영국이 미국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결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가 예정된 날이 그 토요일이다. 이 두 가지 일은 그의 행동과 심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알게 모르게 그 일들은 하루 일과에 스며들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만들기도 한다.
40대 후반의 그는 뛰어난 뇌 외과의다. 그의 행동과 심리묘사를 보면 만나는 사람들을 한 명의 환자처럼 분석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냉철하고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런 시각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나를 만난 의사가 이런 분석을 하면서 나를 대한다면 어떨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은 나중에 그를 좋지 않은 상황으로 몰아가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몸에 붙은 이런 의사로서의 습관이 쉽게 사라지기는 힘들다. 그래서인지 그의 외면은 내면의 따스함과 열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열중하다보니 세상을 보게 되는 시각은 경험에 기반을 두게 된다. 자신이 만난 환자의 경험에서 반전 시위를 해석하고, 이라크의 현실을 이해한다. 나이가 들게 되면 경험이 쌓이게 되고, 이런 경험의 축적은 사물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냉철하고 분석적이고 따스한 마음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그가 딸과 토론하는 장면에서 느낀 점이다.
토요일 하루 그가 겪은 일은 어쩌면 많지만 일상의 삶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듯한 주변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나타나고, 분노는 한계에 달하고, 공포는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현재에서 바라본 과거는 아름답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그러다 발생한 하나의 사건은 그의 삶을 뒤흔든다. 사실 이 장면을 마주하면서 그 냉정한 대처에 놀랐다. 그리고 그 사후 처리는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지만 그 과도한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몰랐다. 하루의 여정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삶과 가족과 사랑과 사회에 대한 모습들은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울려 퍼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느낀 것이지만 나에겐 이언 매큐언이 딱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