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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평화
존 놀스 지음, 박주영 옮김, 김복영 감수 / 현대문화센터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성장은 많은 아픔과 고통을 필요로 한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노래 가사처럼 삶은 괴로움을 먹고 자란다. 십대에 우린 이 아픔을 자신만의 것으로 착각하고 어른들은 전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기를 지나온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들을 지긋이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바로 힘겨운 시기를 지나온 어른들의 여유다. 그렇다고 그 어른들의 시각이 모두 그 시대에 맞는 것은 아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처럼 가끔은 그 시절의 아픔과 괴로움을 잊고 청소년을 대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아픔과 괴로움에 몰입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일인칭 소설이다. 화자 진은 학교에서 멋진 친구를 만난다. 바로 활기 가득하고 새로운 놀이를 찾아내어 무리를 이끄는데 탁월한 피니어스다. 이 둘은 멋진 콤비를 이룬다. 하지만 진은 피니어스의 진심을 오해한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라난 불신과 질투가 불행한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다. 선의의 경쟁이니 우정이니 하는 말들의 이면에 숨겨진 감정의 어둠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드러난 것이다. 이 불편한 사실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사고 당하기 전 피니어스는 정말 매력적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에 놀라운 운동 실력과 강한 리더십과 활기찬 모습은 읽는 내가 질투를 느낄 정도다. 그래서인지 화자가 피니어스를 자신의 감정으로 재단하고 오려붙이는 현실에 묘하게 동조한다. 육체적 능력은 그보다 떨어지지만 학업의 성취도에서 앞서면서 우쭐함을 느끼고, 최고의 운동선수인 그가 학업 능력이 떨어지는데 반해 자신은 운동 실력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왠지 모르게 우월감을 느낀다. 이 유치하지만 나름 치열한 경쟁심은 피니어스가 부상당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피니어스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다시는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진이 느끼는 감정은 상당히 복잡하다. 그 사고가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에 일어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사고인지. 그와 피니어스는 단순 사고로 믿고자 한다. 하지만 얄밉게도 주변에선 그 사고 원인을 파헤치고자 한다. 아니 어쩌면 사고 원인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것보다 그 사고를 놀이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불편한 행동은 성장기 청소년들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실수들이다. 냉정하게 현실을 보기보다 현실의 재미와 순간의 흥미를 위해 우발적으로 벌이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런 우발 행동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시간 배경은 1944년이다. 한창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다. 학생들은 자원입대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있다. 여기서 재미난 점은 사고 후 피니어스의 심리 변화다. 그는 부서진 자신의 다리를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군 입대를 자원하지만 어디도 부상당한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전쟁을 부인한다. 뚱보 영감 음모론을 내세우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는 마지막에 브린커가 “소외라고! 이 전쟁은 우리 아버지 세대가 책임질 일이야! 그런데 정작 나가서 싸우는 건 우리라고!” 외치는 것과 연결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도 적용할 만한 문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전쟁의 시기는 아무리 평화로운 학교라도 그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말하는 전시 체제는 삶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시기에 가장 친한 친구라도 적으로 생각하고 전선을 세운다면 알게 모르게 막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은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언제나 적나 아군, 흑과 백으로 나누길 원한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겐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성장통을 보통 시기의 청소년보다 더 많이 겪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