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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삼킨 책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 지음, 신혜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이다. 세상을 삼킨 책이라니 도대체 어떤 책일까 호기심을 자극한다. 헌데 친절하게도 책 표지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임을 알려준다. 학창시절 힘겹게 겨우 한 번 읽은 이 책이 세상을 삼킨 책이라니 놀랍다. 철학을 전공했다면 몇 번이라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했겠지만 읽었다는 포만감을 중시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냥 스쳐 읽었을 뿐이다.
소설은 회상 형식으로 시작한다. 한 노인과 그의 손녀가 변한 세상의 도구인 기차를 타고 50년 전 여인을 찾아간다. 그녀의 이름은 막달레나. 단순한 로맨스를 다룰 것처럼 보여주는 도입부와는 달리 과거 속 한 시간과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처참한 죽음과 살인이다. 주인공 니콜라이의 직업은 의사다. 그 당시 전문직으로 현대물에서 전문직 종사자가 주인공을 등장하는 것과 유사한 설정이다. 의사가 주인공이다보니 의사의 시각과 해석이 많은 부분 등장하는데 읽다보면 불과 200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의학수준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놀란다. 뭐 다른 책에서 현대의학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읽었지만 그래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사실이다.
니콜라이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자신의 마을에서 발생한 고양이들의 죽음을 둘러싼 괴소문과 대책회의에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가 비웃음을 산다. 이 일로 그는 신중해지고 새로운 마을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1780년이다. 늦은 밤 일상 진료에 지친 그에게 한 하녀가 찾아온다. 자신의 영주가 죽어가니 진료를 부탁한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 그에게 알도르프 백작은 시체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냥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시체가 발견된 이틀 후 제국에서 조사관이 도착할 정도다. 이 조사관 디 타시는 냉혹하면서 거침없다. 이어서 발견되는 시종 젤링의 처참한 주검과 신비스러운 소녀 목격자 막달레나의 등장은 곳곳에서 벌어지는 우편마차 습격사건과 더불어 단순한 음모나 살인사건이 아님을 암시한다.
작가는 살인사건과 음모를 연결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당시 독일에 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더 많은 재미를 누리겠지만 아쉽게도 나의 지식은 그것까지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백작의 죽음과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기와 그 사기로 만들어진 거액이 사라진 것은 조사관 디 타시를 긴장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 엄청난 금액은 군대를 무장할 정도라고 하니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니 이 냉혹한 조사관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절로 긴장감을 불러온다. 단서를 찾기 위해 죽은 시체를 헤집는 모습은 상당히 충격적이고 그의 특징을 잘 나타내어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활약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궁금했던 것은 언제 <순수이성비판>이 나올까 하는 것이다. 출판사에서 세상을 삼킨 책이 칸트의 책임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정보지만 전체적인 흐름 상 나올만한 대목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조직과 음모와 살인사건이 엮어있는데 한 권의 책이 사건의 단서로 작용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구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부분에선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하게 만든다. 세상을 변하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문자와 책임을 알고 있기에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퍼플라인>에서 약간 지루함을 느꼈는데 이번엔 빠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나온 고양이들의 죽음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지 않는 점이나 뒤로 가면서 드러나는 사실들이 명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어떤 여파를 미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장치가 약하다. 또 냉혹한 조사관 디 타시를 끝까지 살리지 못한 것이나 우편마차 습격이 너무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정신사적 범죄소설이라고 붙인 것에는 동의를 한다. 역사와 철학과 살인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재미가 살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