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누군가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한 번 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어떻게 타냐고 타박했다. 그다지 기차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고, 몇 날 며칠을 기차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현실이 그런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나 다른 책들을 통해서 긴 기차여행이 주는 낭만에 마음이 들썩이고 있다. 혹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전체 구간은 아니더라도 몇 구간은 한 번 기차여행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9,938km. 사실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서울 부산 왕복으로 몇 번이라고 하지만 한 번도 지겹고 힘든 나에게 이 거리는 비현실적이다. 그럼 작가는 이 거리를 단번에 다녀온 것일까? 아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이어진 러시아 여행을 여러 번 다녀온 결과물이다. 하지만 책의 흐름을 고려해 단번에 여행한 것처럼 구성했다. 이 부분은 서문에서 독자의 이해를 구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조차 단번에 다녀오기 힘든 거리가 9,938km이다.

 

책은 재미있고 쉽게 읽히고, 그림은 밝음보다 왠지 모를 회색으로 가득하다. 그 곳 풍경이 그런 것인지 레닌 동상이 주는 색감이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느낌들이 현재 러시아연방의 현재와 과거를 묘하게 대비시킨다. 가끔 그 장소에서 펼쳐지는 시위는 새로운 변화와 과거와 충돌하고 공존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먼 곳의 삶이 우리 현재의 삶과 비교하게 만들고,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역사의 한 시점도.

 

저자는 이 긴 여행 이야기의 시작을 한국에서부터 출발한다. 부산에서 북조선을 넘어 대륙횡단철도와 연결되는 미래를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과연 연결되면 내가 탈 것인가는 뒤로 하고, 낭만적인 풍경과 수많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기차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런데 저자는 그 시작점을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의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일까? 여기엔 현재 단절된 분단 상황과 러시아의 팽창정책이 묘하게 연상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는 백야 속 불면을 만난다. 이 불면 속에서 “이루고 싶었고 목격하고 싶었던 변혁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의지의 종말”이 만든 상흔을 마주한다. 시간은 이 상흔을 중화했지만 기억 속에, 추억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어쩌면 그런 상흔들이 레닌동상이 있는 러시아연방 도시들을 돌아다니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그 도시들에서 레닌동상을 만난 것이겠지만 그가 그곳에서 만난 여럿 동상은 착잡하면서도 다양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홉 도시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문학이나 다른 서적을 통해 만날 때보다 더 그렇다. 각 도시들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이 이야기에 현실과 과거를 차분히 이야기한다. 혁명의 꿈이 사라진 현실에 대한 아쉬움과 그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제 시들해진 레닌의 인기와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한 체 게바라를 비교하면서 머리숱을 많고 적음을 우스개로 풀어내는 여유와 유머는 모스코바에 가득한 한국제품 광고와 제품들로 이어지며 현실과 과거를 동시에 생각하게 만든다.

 

긴 여행 사진 속에서 만난 다양한 얼굴의 사람들은 이 거대한 제국의 넓음을 짐작하게 만들고 가끔 우리와 별 차이 없는 얼굴을 만나면 고려인들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같은 몽골계지만 다른 민족임을 보면 저자의 말처럼 긴 과거의 한 시점에서 서로 이어져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도시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민족들의 이야기는 변화하는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학창시절 러시아 지명과 인명은 참으로 외우기 힘들었다. 덕분에 책에서 그들을 만나면 늘 버벅거리곤 했다. 그런 힘겨움 속에서 그때 읽던 책들이 보여주던 낭만과 환상은 이제 많이 퇴색했다. 이 책을 따라 여행하다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해진다. 전 세계가 권역화 되고 자본주의가 강화되는 현실에 눈을 감을 수 없지만 그 시절의 꿈을 잠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가 여행한 곳과 관련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인지 모르지만 시베리아에서 죽어간 수많은 민족과 사람들의 수치가 없다. 레닌으로부터 시작한 혁명이 그 싹을 제대로 띄어보지 못하고 스탈린에게서 무참히 꺽인 현실 속에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능가하는 학살이 있었던 그 기록들 말이다. 그 혁명의 대지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기억해야할 사실이 이 책에 담기엔 너무 무거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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