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놀이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박종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처음 이 책을 들고 생각한 것은 단숨에 읽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몇 장을 넘기기 전에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한 남자의 기나긴 자기 변론은 프랑스의 나폴레옹까지 끌어들여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가 벌인 ‘놀이’를 보면 상당히 냉정하고 얼음 같을 것이란 느낌도 들지만 그 자신도 다른 놀이자들의 상대가 되는 것을 보면 그렇게까지 비정하고 냉정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소설은 자신이 왜 그 남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말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그려낸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성장하면서 마주하게 된 몇 가지 일들이 평범한 삶으로부터 정상적이지 못한 삶으로 이끈다. 그 긴 변명을 듣다보면 자신의 변호사에게 보내는 변론서 역할보다 오히려 자서전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도 상당히 비틀린 자서전 말이다.

 

범죄소설이고 공공장소에서 살인을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이 남자가 살인을 하고, 왜 하는지 상당히 궁금했다. 하지만 작가는 책의 마지막까지 살인에 대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철학을 길게 풀어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닮은꼴로 나폴레옹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범죄를 변론한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것이 단순히 멈추거나 타협해야할 역사적 순간에 멈추지도 타협하지도 않고 자신이 만든 놀이판에서 놀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아전인수도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뭐 일면 그의 이론에 수긍을 하게 된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 이런 장면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보이는데 그 보이는 길을 피해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호이징가가 말했던가? 호모루덴스라고.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본질은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그의 인간관을 여기에 직접 대입하는 데 무리가 있다. 하지만 책속의 화자가 말하는 놀이도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호이징가가 말한 인간의 본질이자 문화의 근본까지는 아니더라도 쉽고 편하고 단순한 길이 아닌 창조적이고 변화가 무궁한 놀이다. 이런 놀이의 개념을 자신의 긴 인생 역정을 통해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분명히 계획된 살인인데.

 

그 계획 살인을 그는 불가피한 살해라고 주장한다. 그가 좋아하는 스포츠인 당구를 빗대어 긴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처럼 살인도구로 당구 큐를 이용한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살인도구가 나중에 반환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여 다른 큐를 사용한 것이다. 이것을 알면 그의 재판에서 분명히 나쁜 결과를 가져올 텐데 말이다. 하지만 변호사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 이를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나중에 그 변호사를 자신의 공모자로 만들려고 하니 대단한 사람(?)이다.

 

만약 이 소설에서 살인사건을 둘러싼 형사들이나 탐정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왜냐고? 그런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오는 인물이라고는 화자와 관련된 몇 사람뿐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양어머니와 계모의 아들 정도랄까? 그 외 스쳐지나가듯 나오는 인물들이 그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이들처럼 길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이를 보면 성장기의 중요성을 은연중에 표시하는 것은 아닌가 짐작한다. 이 부분은 화자가 앞에서도 자신의 삶의 변화가 없었다면 평범한 공장 사장으로 아이들을 낳고 살았을 것이라고 한 대목에서 반복된다.

긴 자서전적 독백을 읽다보면 당구와 놀이라는 두 가지를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 체스보다 더 다양한 가능성과 능동성을 말하고, 나폴레옹 같은 인물들의 놀이에 대한 열렬한 숭배와 권태를 벗어나려는 모습은 활동적인 화자를 보게 된다. 비록 그의 놀이에 대한 이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곳곳에 드러나는 냉소적인 문장과 블랙유머는 그 황당함을 가볍게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근대의 평등이론을 교육 받고, 부조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생각하면 결코 이 책속에 담긴 이야기가 가벼운 놀이로, 이야기로 취급할 것은 아니다. 이 책 역시 다음에 다시 정독해봐야 그 맛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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