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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왕의 전설
라우라 가예고 가르시아 지음, 권미선 옮김 / 평사리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재미있고 의미심장하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과 인생과 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평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차근차근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많지 않은 분량이기에 단숨에 읽지만 그 긴 여행을 같이 떠나다보면 세월과 삶의 무게를 느낀다. 청소년 도서라고 하지만 나 같은 중늙은이가 읽어도 무리가 없는 소설이다. 아니 지나온 세월만큼 느끼는 것이 많을 수도 있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왕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킨다의 왕자 왈리드다. 사막의 정령 ‘드진’에게 축복을 받았다고 사람들이 말하며, 총명하고 잘 생기고 늠름하고 인자하고 신중하고 교양이 풍부하고 박식하다. 이런 그에게 욕심이 하나 있다. 바로 최고의 시인들이 매년 유까스에 모여 경합하는 시 경연 대회에 나가는 것이다. 최고의 시인에겐 그의 시 ‘카시다’를 금으로 써서 카아바 신전에 거는 영광이 있다. 왕은 왕자를 걱정하여 자신의 왕국에서 시 대회를 개최해 우승하면 떠나도 좋다고 허락한다. 하지만 그 대회에서 왕은 우승하지 못한다. 늙은 양탄자 짜는 사람 함마드에게 진 것이다. 이후 두 번 더 연속으로 그는 패한다. 이에 그의 마음은 분노와 질투에 휩싸인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생각났다. 모든 것이 다 도망가고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란 존재가 왕자에게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하나 가지지 못한 시인의 영광이란 것과 비교되었다. 판도라가 희망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려고 했다면 왈리드 왕자는 질투라는 감정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하나와 전부라는 두 단어를 둘러싼 이야기가 사람의 욕심과 맞물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혹시 나는 하나 때문에 나머지 소중한 것을 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경우는 없었나?
책 전반부가 왕자가 함마드에게 지고 질투하고 그를 파괴하려고 하는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함마드가 만든 인류의 모든 역사를 수놓은 놀라운 양탄자를 쫓으며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진실에 대해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함마드와 연결시켜 풀어내면서 인과의 고리를 통해 자신의 삶과 운명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왕자의 아버지 우리 모두 우리가 한 행동에 책임져야 하고, 우리가 한 짓은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한 것과 맞물려 있다. 그 악연을 풀어내는 것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다.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왕자가 후반부에 자신이 배운 훈련과 지식 덕분에 사람들의 호의와 부를 쌓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그 호의나 부는 왕자가 죄지은 과오를 단숨에 풀지는 못한다. 그에겐 더 많은 시련과 고통이 따라온다. 뜨거운 사막의 열기가 몸속으로 파고들고, 다른 도적들의 폭력에 다리가 부러지고,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는 고난을 겪은 후에 양탄자를 찾지만 그 신묘한 양탄자를 들여다볼 자신이 없다. 그 자신이 처음 이 양탄자를 보고 공포에 질렸듯이 이것을 훔친 도적들도 공포에 질려 살아가지 않았는가! 과연 그는 인간의 모든 역사를 수놓은 양탄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까? 그 속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악연의 사슬을 풀 수 있을까? 하나의 감정으로 모든 것을 잃은 왕자의 정신적 성장을 다룬 이 소설이 ‘카시다’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마음속에 조용히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