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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우리 사람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열린책들 세계문학 294권이다.
이 시리즈도 정말 꾸준히 잘 나오고 있다. 좋은 일이다.
오랜만에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읽었다.
이 책 이전까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은 정말 잘 읽히지 않았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들도 미로 속에서 헤매는 느낌을 받았다.
과거 기억 때문에 사실 이 소설도 힘들게 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 걱정은 기우였고, 생각보다 빠르고 재밌게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이 풍자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1958년 쿠바 아바나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직 카스트로가 혁명으로 정권으로 잡기 전이다.
아바나에는 각국의 스파이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워몰드는 진공청소기를 판매하는 상인이고, 이혼 후 딸 몰리와 살고 있다.
딸은 천주교 학교에 다니고, 돈 씀씀이가 좋은 편이 아니다.
일을 마친 후 오랜 세월 술을 같이 마신 친구인 닥터 허셀바흐가 있다.
둘은 술집에서 같이 한 잔 후 서로 헤어지지만 오랜 친구란 유대감이 있다.
이런 평범한 일상에 갑자기 한 남자가 찾아오면서 깨어진다.
그는 영국 정보부 소속이고, 워몰드가 요원으로 활약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돈의 유혹이 그를 정보부를 위해 일하는 요원으로 변화시켰다.
요원이 된 워몰드는 사실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돈을 얻어내기 위한 가짜 보고서와 가짜 정보원들을 만들어낸다.
가짜 보고서 중 하나는 그가 판매하는 진공청소기 일부를 그린 것이다.
정보부 직원들은 이것이 진공청소기와 닮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 ‘그사이 런던에서 벌어진 일’에 나온다.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뭐가 이렇게 허술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원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서 교차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는 모습이 코믹했다.
하지만 바로 이 코믹함이 작가가 의도한 연출이었다.
실제 이런 황당한 사건이 있었고, 그 아이디어를 이 작품 속에 녹여낸 것이다.
워몰드는 영국 정보부에서 ‘아바나의 우리 사람’이라고 부른다.
비밀번호가 있지만 이 표현 속에 담긴 신뢰가 사건을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키운다.
가짜 정보에 넘어가 그를 돕기 위해 비서와 다른 요원을 아바나에 파견한 것이다.
매일매일 가짜 정보와 가짜 정보원을 만들어내야 하는 워몰드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언젠가 자신의 비밀을 비서에게 말해야지 생각하지만 정보부의 돈은 달콤하다.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한 정보부의 압박은 그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정보원이라고 말했던 라울이 죽는 사건이 생긴다.
거짓을 사실이라고 믿는 다른 나라 요원들이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이다.
황당하지만 현실은 사실보다 자신들이 믿는 바를 더 믿고 따른다.
이때까지 평범했던 진공청소기 판매상이 진짜 스파이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훈련받지 않은 스파이의 허술한 행동은 보는 내내 허술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의 진심과 상황 등이 그 세계의 문을 그에게 열어준다.
이때부터 긴장감이 생기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일부 장면에서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다음 장면을 상상하게도 한다.
실제 인물에 비해 덜 잔혹하게 등장시킨 캡틴 세구라에게도 인간미를 부여한다.
이 소설의 진짜 백미는 그의 가짜 스파이 활동에 대해 알게 된 정보부의 반응이다.
우리가 스파이 소설에서 본 냉혹하고 잔인한 정보부 대신 희롱당하는 정보부가 나온다.
어쩌면 이 모습이 정부 조직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풍자와 스릴러가 함께 있지만 나에게는 풍자의 느낌이 더 강하다.
아주 살짝 그레이엄 그린의 다른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