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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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아르헨티나 작가다.

대실해밋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한 소설이다.

화려한 평가보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30년 동안 홀로 범인을 추적했다는 부분이다.

어떤 사건이기에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범인을 쫓았을까?

여기에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연쇄살인이라는 나의 착각도 한몫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30년 전 토막나고 불에 탄 채 발견된 소녀와 그 가족과 친구 이야기다.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진행되지 않고,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다.

이 과정에 그 시체가 의미하는 바와 어떤 사연이 있는지 하나씩 흘러나온다.


30년 전 죽은 소녀의 이름은 아나였다.

세 자매 중 막내였고, 열일곱 살의 어린 소녀였다.

그녀의 시체가 발견된 후 둘째 언니 리아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강한 반감과 거부감으로 돌아온다.

엄마와 언니 카르멘은 열성을 넘어선 광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장례식 이후 리아는 집을 떠나 스페인에 오게 되고 그곳에서 살게 된다.

그녀가 유일하게 연락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유일하다.

이 연락도 전화가 아닌 편지이고, 사서함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숨긴다.

서점을 운영하고 있던 그녀에게 언니 부부가 찾아온다.

자신은 존재조차 몰랐던 조카 마테오의 마지막 흔적이 여기였다고 말하면서.


리아가 아버지와 어떤 내용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말한다.

아르헨티나와 단절된 그녀의 삶에 유일한 연결 고리인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언니를 통해 듣는다.

언니 부부는 갑자기 연락을 끊고 사라진 아들 마테오의 행방이 너무 궁금하다.

이제 이야기는 마테오로 넘어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풀어놓는다.

신의 이름으로 강압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

토막나고 불탄 채 발견된 죽은 이모에 대한 이야기.

외할아버지 알프레도와 함께 이야기하고 그렸던 유럽의 성당들.

건축학을 포기하고 정신의학으로 진로를 바꾼 선택의 이유들.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세 통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한 통은 이미 리아와 함께 봐야 하는 것이고, 에필로그 부분이다.


아나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마르셀라를 통해서다.

그녀는 아나가 죽는 순간 같이 있었고, 떨어진 성상에 의해 단기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그 이전 기억은 뚜렷하게 떠오르지만 그 이후 기억은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녀는 수많은 공책과 기록을 통해 자신의 현재를 남겨둔다.

이 병과 관련된 영화로 <메멘토>를 추천하는데 볼 때 상당히 어려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작가는 그녀의 기록을 통해 그녀의 주장과 사실을 알려준다.

단 하나 분명하지 않은 것은 아나가 절대 말하지 못한 존재에 대한 것이다.

그 인물이 밝혀지면 살인범의 정체가 밝혀질까? 아니다.

하지만 이 비극적인 사건의 꼬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한 것보다 더딘 속도로 읽었다.

묵직하고 서로 다른 목소리와 하나씩 드러나는 비밀이 시선을 끌었다.

30년 전 사건을 파헤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짧지만 강렬하고, 그 가족 등의 이야기는 무겁다.

후반부로 가면 나약한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참혹한 진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선택이, 그 상황이, 그 죽음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린 신의 뜻이란 핑계와 거대한 동조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수많은 자기 기만과 변명에 ‘나라면’이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와 같은 잔혹한 행동은 못하겠지만 몇몇 상황에서 과연 진실할 수 있을까?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과 그 믿음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내었다.

무엇보다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과 그들의 삶을 엮고 풀어낸 부분들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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