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묘한 느낌을 준다. 온다 리쿠의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분위기에 놀란다. 각각의 분위기가 다르지만 아득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보인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는 말처럼 현재를 그리기보다 과거의 흔적을 다양하게 그려내는데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가 보다.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글을 쓰지만 역시 그녀의 책엔 하나의 분위기가 지속적으로 느껴진다. 이 소설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그 느낌이 손에 잡힐 듯하면서, 실체가 보일 듯하면서 빠져나간다.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살인사건을 다룬다. 하지만 그 살인사건은 끔찍하다. 일가족 독살사건이다. 할머니 미수 생일 행사에 참여한 집안 어른뿐만 아니라 단골업자나 이웃들에 아이들까지 열일곱 명이나 죽은 사건이다. 그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는 단 한 사람, 그 집의 손녀이자 눈 먼 소녀다. 이후 자살한 범인이 밝혀졌지만 공범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골적으로 유일한 그 집안의 생존자인 눈 먼 소녀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추리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특이한 구성과 전개를 보여준다. 하나의 사건을 다루지만 범인의 과거를 쫓는 것도 아니고 살인사건 현장을 섬세하고 자세하게 묘사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일인칭 대화와 각 화자의 생각이나 그 날이나 그 곳 사람들과 관련된 회상으로 가득하다.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소녀이자 나중에 그 사건을 다룬 책 ‘잊혀진 축제’의 저자부터 시작하여 그녀와 함께 인터뷰에 참가한 남자 후배부터 그 사건을 담당한 형사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개인사와 더불어 그 사건 전후의 감상과 느낌을 전하고 있다. 그 방대한 기록 속에 자살한 범인에 대한 기억부분은 거의 한 사람 분량 밖에 없는데 이것도 상당히 특이하다. 아니 작가가 의도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조정하였는지 모르겠다. 이 부분이 다른 범인에 대한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그 실체를 정확히 가름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더 부정확하다. 원판에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덧붙여 나가는 것이다. 가끔 정확한 핵심이 살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식하는 자신의 편의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어진다. 하지만 엄청나게 끔찍한 사건의 경우 그 윤곽이 너무나도 뚜렷하여 쉽게 덧칠하기가 어렵다. 이 소설은 이런 왜곡과 뚜렷한 윤곽 사이를 절묘하게 파고들어 묘사한다. 각자가 자신의 감정과 목적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지만 기본적인 핵심은 살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 기억에 발목이 잡혔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몇몇은 간접적인 관계자라 단순한 추억의 한 장일 수 있지만 중심과 연결된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의문이자 짐일 것이다.

 

감각적이고 희미한 이미지를 품어내는 글 속에서 약간은 당혹스러움도 느낀다. 익숙한 추리소설의 전개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론 실체에 대한 모호함 때문이다. 물론 후반부로 가면 사건과 관련된 하나의 진실이 말해지지만 그것도 확실한 실체를 보여준다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그 실체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고 한다면 나의 과한 착각일까? 마지막으로 가면서 나오는 단서들도 이런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한다. 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느낌일 수도 있다.

 

책 속에 ‘제국호텔 살인사건’이 나오는데 이 부분에 눈이 갔다. 이전에 요코미조 세이시의 원작 ‘악마가 오라고 피리를 분다’라는 일본 드라마에서 이미 접했기 때문이다. 그 외 몇몇 낯익은 상황이 나와 즐거웠다. 책 속에서 내가 아는 사건이나 소설 등의 내용이 나오면 반갑고 즐거운 것은 내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확한 실체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익숙한 것이 나옴으로 인한 반가움 때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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