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창비시선 476
이정록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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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476권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처음 읽는 시인이다. 30여년의 시력을 가진 시인인데도 그렇다.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이다. 긴 세월을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시집 출간은 아니다.

비교적 천천히 읽은 시집이지만 분량이 많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집이 아니지만 시어들을 곱씹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똥 싸는 일을 / 뒤를 본다고 쓰는 / 얼간이도 있다마는 // 뒤를 본다는 것은 / 알을 낳는다는 말이다 / 희망을 돌아본다는 약속이다” (<뒤편의 힘> 일부)

이 시를 읽을 때 잘못 읽었다. 다시 읽으면서 희망을 돌아본다는 약속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집은 다른 시집보다 작게 소리 내어 읽은 시들이 많다.

시가 잘 읽히지 않을 때, 이해가 전혀 되지 않을 때 소리를 내어 시를 읽는다.

그럼 조금 더 잘 이해하고, 한발 더 다가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무릎 수술을 한 노인과 버스 기사의 농담을 다룬 시가 재밌다면 <꼬마 선생님>의 시는 눈시울을 붉힌다.

<구명조끼>를 읽으면서 “저수지에 들어간 뒤 쉰 넘어까지 나오질 않았다.”고 한 부분에서 순간 울컥했다.

아주 오래 전 강에서 나오지 못한 친구나 아는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꽃길만 걸어요>에서 꽃길만 걸어라는 편지에 “당신도 꽃길만 걸어요 / 당신도 비단길만 걸어요”라고 했을 때 그 지극한 마음이 가슴에 콕 와닿았다.


“거실까지 따라 들어온 / 구두 한짝이 바짝 엎드려 있다. // 너도 밤새 배가 많이 아팠구나.” (<과음> 전문)

이 간결한 시를 읽고 전날 과음한 시인이 집에 들어오면서 어떤 행동을 했을 지 바로 떠올랐다.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상황을 마주했을 것이다. 만약 없다면 누군가 그 신발을 정리한 것이다.

<게걸음>도 이 연장선에 있는 시다. 아마 거실에 오기 전 취객의 모습이 아닐까!

<고욤>의 시를 읽으면서 그 아버지의 마음이 쉽게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놓쳤을까?


<일곱 마디>란 시에서 “’뚝’과 ‘딱’은 신의 말씀이고 / ‘뚝딱’은 인간의 소리다 // 비는 딱 그치고 / 꽃은 뚝 떨어진다”고 했을 때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성악설>의 전문 “연통 속이 검어질수록 세상은 따뜻해진다. // 속이 탄다는 말, 젖은 목장갑도 희고 둥글게 마른다.”을 읽고 어디에 눈길을 주어야 할 지 의문이다. 검은 연통과 세상의 따스함을 연결한 감성이 좋다.

구멍 난 파스를 두고 벌어진 대화를 시로 풀어낸 <구멍>이란 시는 또 어떤가. 작은 해학이 묻어있다.

그리고 시 곳곳에 충청도 사투리를 녹여 정감 있게 쓴 시들은 또 다른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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