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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인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평점 :
<편의점 인간>으로 아쿠타가와상 수상 이후 단 일 년 만에 완성한 소설이다. 책소개를 대충 읽었을 때 BBC 선정 ‘2020년 최고의 책’, 뉴욕타임스 선정 ‘2020년 주목받는 100권’에 이름을 올렸다고 했을 때 최근 작으로 착각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 이후 이 작가의 작품들이 많이 번역된 것을 생각하면 약간 의외다. 어쩌면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엽기적인 장면들 때문에 조금 주춤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을 읽을 때 느낀 예상 외의 참혹한 장면은 다른 소설을 읽을 때 느낀 감정을 초월한다. 이런 거침없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첫부분은 평범한 가족의 할아버지집 나들이다. 언니와 달리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차에서 힘겨워하지 않는 씩씩한 소녀 나쓰키가 등장한다. 자신을 마법소녀라 말하는 대목을 읽을 때는 작가의 다른 소설 장면이 연상되기도 했다. 사촌인 유우를 자신의 연인이라고 말할 때도 어린 소녀의 풋풋한 첫사랑 정도로 생각했다. 온 친척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산속 마을의 풍경은 아직 대가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조금은 낭만적인 풍경이다. 연인 유우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산속의 풍경을 즐기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녀와 달리 언니는 아주 이 상황을 힘들어한다. 엄마가 두 딸을 대하는 방법도 너무 다르다. 작은 딸 나쓰키를 머저리라고 부를 때 잠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우는 고모가 낳은 아이가 아니다. 유우도 이 사실을 안다. 유우는 자신을 포하피핀포보피아별에서 온 우주인으로 생각한다. 우주선을 찾으면 자신의 별로 갈 것이라고 말한다. 흔한 소년 시절의 재밌는 상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쓰키다. 아주 친해진 둘은 연인이었다가 나중에 서로 결혼한다. 물론 아이들의 결혼이다. 유우가 자신의 별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는다. 서약서도 작성한다. 그 중에서 눈에 계속 밟히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기’다. 어린 소년 소녀가 왜 이런 단어를 사용해야 했을까? 그리고 나쓰키 엄마가 보여주는 차별과 학대는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가중시켰다.
나쓰키는 사랑스러운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지 못한다. 엄마는 큰딸과 차별하고 학대하고 무시한다. 아빠는 방관자로 겉돌고 있다. 언니의 무시는 또 어떤가. 마음 한 곳이 망가지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마법소녀로 회피하면서 유지한다. 느리고 서툰 그녀에 대한 엄마의 냉대와 학대는 그녀가 성폭행을 당한다고 말했을 때도 결코 사실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작가는 엄마가 어떤 기존과 생각으로 나쓰키를 학대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보여줄 뿐이다. 이 현실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미래를 제대로 펼칠 생각도 못한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뒤틀린 현실 도피다. 그 과정 중 하나가 유우와의 섹스다. 이 행위가 제대로 되지도 않았지만 어른들이 볼 때 위험하고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둘은 만나지도 못하고, 나쓰키는 할아버지집에 가지도 못한다.
그날 이후 부모는 나쓰키를 집중 관리한다. 아이가 벌린 황당한 사건이 그들 가족의 삶을 어떻게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잘 생긴 학원 선생은 이전처럼 아이를 성폭행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학원 선생이 아이에게 구강 성교를 강요하는 장면은 아주 역겹다. 엄마는 도움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유우를 만났을 때도 자신의 입은 오염되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이런 자신의 경험을 친구에게 말했을 때 그 친구들이 보여준 반응은 또 어떤가. 타인의 경험을 바로 보려고 하지 않고 그냥 다른 경험으로 뒤섞어버린다. 그녀의 삶이 계약 결혼으로 섹스리스 삶을 살게 된 데는 이런 과정들이 앞에 놓여 있었다. 계약 남편 도모오미의 존재는 서로 가족으로부터의 탈출구가 된다.
인간에게 노동과 번식은 불멸을 위한 가장 중요한 행위다. 섹스를 ‘사랑’이란 단어로 미화시키고, 아이를 낳기를 강요한다. 이런 현실을 그들은 공장이라고 부른다. 공장 속에서 자의식을 잃고 살아간다면 그들 부모가 바라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둘은 각각의 이유로 이 삶을 살지 못한다. 남편 도모오미는 어릴 때 나쓰키가 경혐했던 시골마을 아키시나를 이상향처럼 생각한다. 이 마을에는 어른이 된 유우가 현재 살고 있다. 이후 이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읽으면서 강한 충격을 받은 장면들을 마주한다. 다름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변이는 무섭고 참혹하다. 몇 번에 걸쳐 그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 장면을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도발적이고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상상과 비유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