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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상자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7월
평점 :
1996년 작품이다. 편집자의 후기를 읽기 전까지 이 소설이 이렇게 오래 전에 나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집에 쌓아 둔 작가의 소설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언제 시간 나면 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 미스터리 소설들에 빠져 보려고 계획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독서 순서는 출간 연도 순이었다. 그런데 편집자 후기를 읽고 다른 방식으로 읽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 덕분에 모셔 둔 책들이 아닌 것들도 먼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한참 이 작가의 초기 걸작에 빠져 정신없이 모은 책들이 대부분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숫자에 눌려 감히 도전을 못하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 에도 시대 시리즈 한두 권 정도는 읽고 싶은데 과연 가능할지는 자신할 수 없다.
인터넷 서점에 장편소설로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 첫 단편이자 표제작인 <인내상자>를 조금은 덜 집중한 채 읽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중에 펼쳐질 것이란 생각을 했다. 다음 단편을 읽을 때도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비슷한 이름이 나오면 앞 단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름 열심히 찾았다. 아마 이 찾기는 책 끝까지, 편집자의 후기를 볼 때까지 이어졌다. 미련하고 둔감한 나의 작은 집착이다. 그리고 편집자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놓친 <인내상자>의 숨은 매력을 발견했다. 무심코 읽은 문장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었다. <나는 전설이다>의 마지막 문장과 그 단편집이 생각난 것도 이 편집자의 후기 덕분이다.
편집자의 후기에서 말했듯이 어떤 소설은 여러 번 읽어야 그 의미가 제대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학창 시절 선입견과 편견으로 단편을 엉망으로 해석한 적이 있다. 나중에 다른 단편을 여러 번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를 열심히 파악하려고 한 글은 생각보다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과거가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이번 단편집에 실린 글들도 마찬가지다. 나의 집중도와 해석에 따라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무심코 읽었던 단편의 의미가 편집자의 해석을 통해 새롭게 다가올 때 다시 앞으로 돌아가 문장을 확인하고 그런 의미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십육야 해골>이다. 내가 놓친 문장과 숨은 의미는 이 소설을 다르게 읽게 한다.
<유괴>란 단편에서 유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유괴나 납치의 의미를 소설 속에서 풀어낼 때 크게 공감했지만 일반적인 생각만으로 현실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에 흘러나온 말과 그 시대의 사건 해결 방식 등은 낯설지만 재밌다. <도피>도 예상을 벗어난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무라이를 보디가드로 고용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일어난 사건은 그 사무라이 때문에 어긋난다. 재밌는 이야기는 그 뒤에 나오는 사무라이의 과거 이야기다. 그리고 그의 검술 실력에 대해 얼버무린 부분은 또 다른 재미다. <무덤까지>는 읽으면서 앞에 나온 <유괴>의 다른 모습으로 삶의 철학이 바뀐 부부의 숨겨진 비밀을 엿보았다. 미아였다가 이 집의 양자 등으로 들어온 아이들의 비밀스러운 사연도 섬뜩하면서 가슴 아프다.
<음모>는 한 관리인의 다른 면모를 잘 보여주는데 마지막 반전이 재밌다. 한 사무라이의 집에서 발견된 관리인에 대한 다른 기억들은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울>은 읽으면서 하나씩 풀려나오는 이야기에 그냥 빠져들었다. 처음 음식을 버린 사연에 공감할 때 기울어진 두 여인의 삶이 가슴속에 들어왔다. 거부의 후처가 된 친구에 대한 질투의 감정은 친구의 약점을 듣는 순간 갈등으로 이어진다. 선택의 순간은 언제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녀의 과거사를 읽다 보면 어떤 선택을 해도 공감할 것 같았다. <스나무라 간척지>는 현실에서 시작해 과거의 추억으로 넘어간다. 그 시절 힘들었던 삶의 기록이 나오고, 숨겨 둔 감정은 어느날 갑자기 밖으로 드러난다. 물론 여전히 가린 채 있어야 하는 비밀도 있다.
이 단편집을 읽다 보면 정말 이 시대에 화재 사건이 많았던 모양이라면서 놀란다. 목재를 사용해 집을 짓던 시절이니 화재에 약할 수밖에 없다. 나무와 불은 조금만 소홀하게 다루면 화재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화재 속에 가려진 인간의 욕망은 그 불을 더 키운다. 내가 <인내상자>를 읽고 난 후 다른 단편들을 이 ‘인내상자’ 속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 것도 이 욕망들 때문이다. 어떤 불은 자신의 사랑 때문에, 어떤 불은 처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불은 저주에서 달아나기 위해서다. 그리고 조금씩 흘러나온 비밀들은 화재 등과 엮일 때 더욱 잔혹하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게 되는 기억력 감퇴를 편집자가 말할 때 다시 나의 저질 기억력을 떠올린다. 단편을 모두 읽은 독자라면 편집자의 후기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