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역사와 추리는 내가 좋아하는 두 분야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 추리소설이 제대로 그 맛을 살려내지 못한다. 현대 추리소설처럼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시대적 한계 때문에 갑갑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고증이라는 발목에 잡혀 그 시대를 그려내는데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몇몇 책에서 재미를 느끼기는 하였지만 항상 나를 궁금하게 하는 것은 그 시대에 그런 것이 있었나? 와 그것이 사실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책도 그런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는 약간 무리가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재미있었다.

 

역사를 다룰 때 가장 중심에 두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표현을 한다면 그것은 판타지가 될 것이다. 이 대목이 이 소설에서 내가 유일하게 불만으로 생각한 부분이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검시관 아델리아가 있는 것이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해부 등을 통해 검시를 한 것은 19세기로 알고 있다. 현대적 의미라는 수식어가 붙을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검시장면을 보면 엄청나게 현대적이다. 그리고 곳곳에 나오는 아델리아의 수술이나 치료 장면을 보면 시대를 뛰어넘는 살레르노라는 곳이 과연 실존했는지 궁금하다. 20세기 초까지 의사들 대부분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사혈을 권장하였다는 기록을 본 나에게 아델리아는 미래에서 온 의사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마음에 들지 않은 몇 가지는 이야기했다.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하니 그 시대 속에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들어가 보자. 1171년 케임브리지셔에서 아이들이 죽는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짓이라고 주장한다. 왕은 수입의 7분의 1을 주는 유대인을 몰아낼 마음이 없다. 얼마 후 놀라운 의학수준을 가진 살레르노에서 케임브리지셔로 유대인 시몬과 아라비아인 만수르와 그리스인으로 추정되는 여자를 포함한 3인이 나타난다. 이 여자가 주인공인 아델리아다. 그녀의 직업은 살레르노에서 검시관이다. 그 능력은 탁월하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 때문에 그녀의 모든 공은 그녀의 양아버지가 가져간다.

 

케임브리지로 가는 도중에 오줌을 누지 못해 고생하는 수도원장을 외과수술로 치료한다. 그 시대는 여자가 의사라는 것을 믿기보다 마녀라고 외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제프리 수도원장은 그 비밀을 소중히 하고 그녀들을 돕는다. 어느 날 그녀가 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산파라고 외친다. 그 당시 여자 치료사 역할은 산파가 한 모양이다. 가짜 의사 만수르를 내세워 그녀가 치료를 하고, 최초의 희생자 피터를 보고 난 후 거리를 떠도는 소문이 거짓임을 안다. 죽은 자와 대화하여 죽은 원인을 찾아내는 역이 아델리아라면 증거를 쫓아 범인을 찾아내는 사람은 시몬이다. 여기에 도움을 주는 자는 세금 징수원인 로울리 경과 어린 소년 울프와 지저분한 개 한 마리가 있다.

 

계속되는 살인사건이 발생하지만 시몬은 유대인이고 아델리아는 여자다. 이 한계 상황에서 진실을 찾아내고 범인을 잡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현대의 CSI라면 강력한 호위 무장 부대가 곁에 있겠지만 그 시대엔 꿈도 꿀 수 없다. 하지만 어린 정보원 울프는 여기저기에서 어린 친구들로부터 정보를 가져온다. 그 정보들이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답을 알기에는 힘들다. 이 소설을 보면서 가장 답답하게 생각되었던 부분이 여자와 민족 차별이라는 한계를 만들어낸 시대다. 과거로 돌아간 소설을 읽다보면 늘 접하는 부분이지만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니다.

 

내가 가장 주목한 인물은 로울리 경이다. 범인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의 숨겨진 정체에 대한 것이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가 십자군 원정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예상하지 못한 활약을 한 것은 지저분한 개다. 그 개의 역할이 영웅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지닌 의미가 수도원장과 결합하면서 놀랍게 여겨진 것이다. 그리고 주교 등과 대립하는 헨리2세의 놀라운 인식과 가감한 일 처리는 역사소설이 주는 재미를 마음껏 누리게 한다. 시대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분노와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는 주교들의 모습은 현재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왜 영국에서 국왕이 종교의 수장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단초가 된다. 하지만 그 시대에서 보여준 종교적 편견과 박해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그대로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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