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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의 여름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5월
평점 :
오랜만에 츠지무라 미즈키의 소설을 읽었다. 상당히 두툼해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일본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인데 가끔 이름을 헷갈려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작가가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작품들을 검색하니 읽은 책들이 보인다. 생각보다 많다. 읽으려고 사 놓고 묵혀 둔 책들도 보인다. 이 소설에 대한 재밌는 소개가 하나 있다. 무려 열한 개 신문사에서 동시 연재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대단하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던지는 문제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야기의 구성 또한 단선적이지 않고 복합적이다. 처음에는 몰입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순간 빠르게 빠져들었다.
대안학교 미래 학교의 옛 터에서 어린 소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백골 시체가 발견된다. 노리코는 이 시체가 미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미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미래 학교 유치부의 미카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보여준다. 미래 학교에 대한 두루뭉술한 윤곽은 독자로 하여금 오해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싶어하는 미카의 모습은 이 학교를 나의 경험으로 판단하게 한다. 노리코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이 미래 학교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하지만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어린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 후 그 소녀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노부부가 등장한 후다. 미래 학교가 판매한 샘물이 문제를 일으키고 노리코가 방문한 학교는 문을 닫았다.
노리코가 미래 학교 여름방학 캠프에 간 것은 반 친구 유이의 엄마가 이 학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특징 중 하나가 ‘문답’인데 이것이 아이의 공부에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미래 학교에서는 문답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자유로운 사고와 발표가 특징이다. 홍보 영상의 샘과 학교 생활은 아이를 매혹하기 충분하다. 반의 최고 인기인 유이와 함께 간다는 것도. 학교로 가는 길은 험하고 힘들다. 현장에 도착해서 마주한 것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친해지고 싶은 유이와 다른 반이 되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때 그녀 곁에 미카가 나타난다. 유치부의 소녀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미카와의 만남은 노리코가 이 캠프를 재밌게 즐기게 만든다.
노리코가 이 캠프에 참여한 것은 모두 세 번이다. 두 번은 미카를 만났지만 마지막에는 만나지 못했다. 사고가 생긴 것은 두 번째 참여 후에 일어났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진다. 이후 노리코는 변호사가 되어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그녀의 일상은 평범한 워킹 맘과 다를 바 없다. 남편은 같은 변호사이지만 다른 사무소 소속이다. 나이 마흔에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이제 그 어린이집을 나와 다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야 한다. 국공립에 지원하지만 쉽지 않다.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하나씩 흘러나온다. 이 경험과 미래 학교의 교육과 조금씩 대비되고 맞물려 진행된다. 현실과 이상의 육아와 교육이 이야기 속에 녹아 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두께가 부담된다. 담고 있는 이야기도 결코 가볍지 않다. 30년 전 있었던 한 어린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은 읽는 내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죽은 아이의 정체가 궁금하고, 미래 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과 소송도 흥미롭다. 샘물 사건 이후 원래 있던 학교와 생수 공장은 폐쇄되었지만 다른 곳의 학교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현 교육체계에 대한 불신이 한몫 했다. 나쁘게 해석하면 한 사이비 종교 단체의 행위로 볼 수 있지만 노리코가 경험해서 들려준 캠프의 모습을 보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샘의 물이 그렇게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을 보면 종교적 기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옴 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을 떠올렸다고 한 부분은 묘한 설정이다.
하나의 사건과 여러 개의 소송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을 내세우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작가는 이 각각의 입장을 말하게 놓아둔다. 특별하게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자신이 미래 학교 여름 캠프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여향을 미칠지 돌아보는 장면들은 아주 인상적이다. 그리고 남편과 이 소송 대리인으로 참여하는 부분을 이야기할 때 남편이 말한 대목은 일에 대한 애정과 깊은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미래 학교가 어린 아이들을 부모와 떨어트린 후 생활하게 하고, 자신들의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 모습은 나에게 낯선 설정은 아니다. SF나 판타지 소설에서 가끔 나오는 설정이다. 나에게 인상적인 것은 이런 설정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기억과 선택의 문제다. 담담하고 서늘한 문장과 표현들은 이것을 잘 드러낸다. 곳곳에 놓아둔 묵직한 문제는 깊이 생각할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