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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피터의 고백 -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히 그랑 지음, 서준환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늘봄 / 2022년 3월
평점 :
이 그래픽노블의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다. 부제로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붙어 있다. 솔직히 말해 표지만 보고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래픽노블이란 사실을 모른 채 부제를 보곤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 읽었던 카프카의 소설들을 생각하면 난해한 책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심해지는 나에게 맞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 출판사 리뷰가 나를 유혹했다. 그래픽노블이고, 책장을 덮고 나면 정말로 무대에서 상연되는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감상한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유혹에 살짝 넘어갔다. 그리고 기대한 것처럼 빠르고 재밌게 읽었다.
한때 연극배우 추송웅 씨가 이 원작을 연극으로 올렸었다. 추송웅이란 이름보다 나중에는 영화배우 추상미의 아버지로 더 알려졌지만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한다. 카프카의 단편집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이 그래픽노블을 읽기 전이나 읽은 후 원작을 한 번 읽었다면 이해의 폭이 더 넓어졌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게으름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작가 마히 그랑이 해석하고 연출한 그래픽노블로 이해해야 한다. 몇몇 대목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이 소설에서 그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빨간 피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턱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연설 연습을 한다. 그가 간 곳은 한 학술원이다. 담배를 물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5년 전 사냥꾼들에게 포획될 때부터다. 맞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침팬지였다. 총에 맞은 후 배에 실려 옮겨진다. 처음에는 나무 상자에 갇혀 있었고, 나중에는 철창에 갇힌다. 그가 왜 빨간 피터로 불리는지도 이때 알려준다. 두렵지만 호기심 많은 그는 뛰어난 관찰을 통해 선원들의 행동을 모방한다. 처음에는 동작을 따라한다. 작가는 이 부분을 아주 간결하게 보여준다. 선원들이 피우는 담배를 건내줄 때 실수를 하기도 한다. 술은 또 어떤가. 그러다 인간의 말을 내뱉는다.
원숭이가 인간의 말을 한다고? 대단한 흥행의 요소다. 쇼는 성공하고, 점점 인간의 삶을 모방하고 배우는 빨간 피터는 사람의 모습을 닮아간다. 암컷 침팬지와 하룻밤을 보내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특히 낮 동안은 대면하고 싶지 않다. “그 망연한 표정, 길들여진 짐승의 눈길에 어쩔 수 없이 고여 있는 슬픔 때문이죠.” 빨간 피터도 인간의 말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에 갇힌 채 이 암컷과 비슷한 표정과 눈빛을 가졌을 것이다. 그럼 그는 인간성을 가졌을까? 인간성의 정의는 또 무엇일까? 장 지로두의 “인간성이란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어떤 시도이다.”란 정의는 인간적 한계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 학술원에 있는 학자들이 빨간 피터의 보고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것도 재밌는 부분이다.
이 그래픽노블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화론을 인용한 그림과 만나게 된다. 인류가 유인원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을 빨간 피터의 보고를 통해 간결하게 보여준다. 물론 5년만에 말을 배우고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지는 않다. 현실을 여기에 대입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그를 작가는 아주 멋지게 표현한다. 가독성을 높이고, 곳곳에 의미 있는 그림을 넣어 놓았다. 성공한 원숭이가 인간처럼 행동하다가 원숭이의 옷을 입고 무대로 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카프카의 소설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카프카의 소설을 이해한 듯한 착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