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일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09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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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 얼어붙은 호수를 생각하면 그 차가움과 서늘함이 먼저 느껴지는데 안전을 먼저 말하다니 어떤 이유일까? 마지막 문장을 읽고 처음엔 그냥 지나갔지만 계속 읽으면서 이 문장을 새롭게 이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의 경험을 통해 얼어붙은 호수와 얼지 않은 호수 밑 상황을 엮으면서 새로운 해석을 만들기 시작했다. 과연 소설 속 호정은 얼어붙은 호수 같이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을까 하는 의문과 얼어붙은 호수가 깨어진 후 겪게 되는 삶의 아픔은 얼마나 강렬할까? 하는 것이다. 과거형의 그 문장은 이야기가 하나씩 풀려날 때마다 호정이 얼마나 차가운 현실 속에서 살았는지 알게 된다.


사실 작가가 모른 채 읽었다. 가독성이 상당히 좋지만 한국 소설을 자주 읽지 않는 요즘을 생각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재밌게 읽은 <아몬드>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유원>을 잇는 성장 소설이란 평을 봤지만 흔한 출판사 광고처럼 다가왔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읽었는데 내 시대와 다른 학생들의 모습에 쉽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들의 삶과 생각들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새로운 학생들의 삶을 보게 되었다. 다른 시절이라고 해도, 그 삶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다르지는 않는다. 호정과 은기, 나래 커플 등을 보면서 풋풋하고 알콩달콩한 사랑의 감정을 재밌게 지켜봤다.


소설을 끌고 나가는 인물은 호정이다. 수시 대신 정시를 노린다고 말하고, 콜드플레이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친한 친구는 나래와 지후이고, 다른 아이들과도 별로 사이가 나쁘지 않다. 평범한 듯한 고등학생의 삶 속에 어느 날 한 전학생이 살짝 들어온다. 바로 은기다. 처음엔 그냥 전학생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 소년은 소녀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은기는 스마트폰도 없고, 버스 대신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한다. 급식 시간에 특별한 친구와 함께 밥을 먹지 않는데 나래가 그를 자신의 테이블로 이끈 후 함께 먹는다. 이렇게 작은 행위들이 쌓이면서 호정과 은기는 가까워진다. 이때만 해도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감정이 드러날 때는 호정의 과거가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호정의 어린 시절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유망한 선수였던 부모는 호정의 임신으로 선수촌을 나와야 했고, 태권도 도장을 차렸고, 중국에 지점을 내면서 집안의 몰락을 가져왔다. 할머니의 노후를 위한 건물까지 팔아야 했고, 삼촌과 고모의 눈치를 받아야 했다. 사업 실패의 대가를 아이가 겪어야 했다. 그리고 여동생이 태어났고, 그 아이는 자신과 다르게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랐다. 작가는 호정이 이 아이를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이 호정의 마음을 얼어붙은 호수 같이 만들었다. 은기가 다른 사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것처럼 호정도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살아간다. 쉽게 이런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은기와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통해 호정의 얼어붙은 호수 같은 마음은 조금씩 금이 간다. 자신이 서투르게 대답한 일과 은기를 둘러싼 소문이 호수의 단단함을 깨트린다. 깨어진 호수 속에서 감정들이 밖으로 분출될 때 그 감정은 제어할 수 없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날이 선 말을 내뱉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다. 보는 사람이 안타깝다. 자책하고, 스스로 상처를 줄 때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이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잊고 살아가는 모습은 충격적이다. 그들에게는 이 혐오와 비난이 한 순간의 놀이였던 모양이다. 작가는 여기에도 살짝 진중한 소년을 한 명 끼워 놓고 사실을 알려준다.


읽다 보면 어딘가에서 본 듯한 학생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소녀가 나래다. 활발하고 부유하고 이벤트에 목숨을 거는 소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듯한 나래다. 하지만 단순히 본 듯한 소녀에 그치지 않고 그 또래 소녀의 연애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 무거울 듯한 이야기에 경쾌함을 덧붙인다. 밝고 유쾌한 그녀를 보면 얼어붙은 호수 위를 지치는 썰메나 스케이트를 보는 것 같다. 지후가 한남이란 표현을 하는데 발끈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재밌다. 상처 입고, 아프고, 그리워하고, 사랑한 소년과 다시 만난 후 그들이 보여준 아주 성숙한 모습은 지금의 나라도 감히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앞으로 얼어붙은 호수를 보면 왠지 이 소설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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