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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평점 :
오래 전 이 책을 사 놓고 잊어버렸다. SF 문학상인 네뷸러상을 수상했다는 소식과 좋은 평가가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늘 그렇듯이 사 놓고 묵혀두기만 했다. 다시 이 책을 받았을 때 예전 기억을 잠시 떠올린 것은 이번에는 완독할 기회가 생겼다는 반가움이다. 실제 읽으면서 예상한 것보다 더딘 속도를 보여주었는데 한 자폐인의 언어와 생각을 표현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상인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소설 속 주인공 루 애런데일이 보여주는 행동은 이성적이고 훌륭하다. 다만 이성과 감성의 불일치가 만들어낸 상황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이 소설이 SF가 맞는지 묻게 된다. 자폐인을 다룬 다른 소설과 순간적으로 비교한다. 그 소설은 <앨저넌에게 꽃을>이다.
근미래에는 자폐를 모두 치료할 수 있게 된다. 이 치료 전에 태어난 사람들만 현재 자폐인으로 살아간다. 루와 그의 직장 동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 자폐인들은 특수부서에 일한다. 정상인처럼 소통하는 것은 힘들지만 패턴을 발견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수익이 상당하지만 새롭게 부임한 관리자 크렌쇼는 이들이 누리는 특별한 복지 혜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자폐인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의료 기술을 이들에게 시험해보고 싶어한다. 만약 이들이 이 수술을 거부한다면 해고도 할 마음을 품고 있다. 이 부서를 관리하는 부하 직원에게 이 정상화 수술을 받게 하라고 명령한다. 이 부서가 얼마나 생산성이 높고 회사의 이익에 기여하는지는 크렌쇼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루는 직장을 다니고, 운전을 하고, 취미 생활로 펜싱을 한다. 회사에서 자폐인 동료들과 잠시 피자 등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이외의 관계는 맺지 않는다. 외부에서 루가 펜싱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그의 진짜 친구들이다. 루는 펜싱을 하기 전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상대방의 움직임 속에서 패턴을 발견한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훈련을 했기에 그의 실력은 점점 좋아진다. 그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 돈은 운동 전에 스트레칭도 하지 않고,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루보다 먼저 펜싱을 했지만 실력은 뒤쳐진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괜히 루 탓으로 돌리면서 그를 괴롭힌다. 돈을 친구로 생각한 루는 이 가능성을 애써 부인하려고 한다.
소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나는 루가 속한 회사가 자폐인에게 강요하는 수술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루가 배우는 펜싱과 그 친구들이다. 루가 펜싱 대회에 나가 보여준 실력은 첫 출연에 비해 아주 뛰어나다. 하지만 그를 가르친 톰의 말 실수가 돈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이후 루의 차 타이어가 모두 터져 있거나 차 앞유리창이 깨지거나 배터리가 없어진다. 이 상황을 경찰에 신고한다. 읽으면서 범인이 누군지 금방 알게 된다. 하지만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누가 범인인지가 아니다. 누가 경험하는 일들과 감정들이다. 읽으면서 답답한 점도 있지만 그 순수하고 이성적인 마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루는 펜싱 모임의 마저리를 좋아한다. 자신이 자페인이라 사실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아주 이성적으로 상황을 마주하는 루이지만 마저리와 관계된 일에는 허둥지둥한다. 재밌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감정이 자신에게 강제적으로 다가온 자폐 개선 수술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한다. 연구원이 주는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기초 공부를 하는데 이때 그가 보여준 놀라운 학습 능력은 어떤 기대를 품게 만든다. 작가는 천재의 기발한 발상이나 환상적인 치료보다 자폐인의 삶과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엮어 갈등 등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 소설의 제목은 실제 작가의 아들이 물은 질문에서 비롯했다. 빛과 어둠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흔히 어둠을 장소로만 간주하는 것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한다. 이것을 조금 비틀면 자폐인과 정상인의 관계도 설명 가능할까? 앞으로 자폐인이 생길 가능성이 없는데 현재 있는 자폐인을 고칠 수술을 연구한다는 설정은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지만 뇌 수술을 둘러싼 과거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모습을 감안하면 이 소설 속 루와 자폐인 동료들의 대화 속에 드러난 감정들은 아주 솔직하다. 묵직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근미래 SF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