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지음, 김상훈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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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에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화화했다는 사실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철저한 고증’에 기반했다고 하니 더 관심이 갔다. 그런데 실제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이 책 소설이 맞아?’ 하는 의구심이다. 일반적으로 역사 소설하면 떠오르는 전개나 표현들이 이 책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오히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고 재구성한 역사서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 시대를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하나씩 재구성하는 부분은 역사 덕후들에게 즐거움이 되겠지만 일반 역사 소설 애호가라면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전개와 마무리도 다양한 의견을 넣어서 역사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14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카루주 – 로그리 결투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이 분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상당히 흥미로운 전개일지 모르지만 이 역사에 무지한 나에게는 그냥 늘 있었던 결투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 결투가 제목처럼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사적 결투를 영화나 소설 등에서 많이 봐서 그런지 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예상 외의 사실이다. 기사들끼리의 대결이 하나의 축제처럼 다루어지는 후반부는 흔치 않은 일이기에 더 열광했는지 모른다. 이 대결의 결과에 서로의 목숨과 판결의 승패가 달렸다는 사실은 이 결투 이전에 얼마나 엄밀한 소송전이 있었는지, 그 이면에 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묻어버리기 좋다. 작가는 이 마지막 결투까지 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도입부에서 카루즈 가문이 어떤 곳인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 그의 가문이 어떤 영주에 소속되어 있는지 알려준다. 실제 이 시대 계급 제도나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읽다 보면 나의 편향된 지식을 확인하게 된다. 백 년 전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잔다르크가 활약하기 한참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책 속의 전장 중 한 곳은 영국이다. 프랑스 군이 영국을 침공해 벌인 학살과 약탈이나 동맹군으로 참여한 스코틀랜드 군의 모습은 이들이 단순한 피해자로만 인식했던 나의 지식을 어느 정도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장 드 카루주는 자신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영지를 친구였던 자크 르그리에게 계속 빼앗긴다. 이 둘은 모두 피에르 백작의 봉신인데 백작이 르그리를 계속 우대하면서 이 둘의 관계는 조금씩 금이 간다. 이 파국이 완전해지기 전에 화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카루즈의 아내 마르그리트가 르그리를 처음 본다. 두 번째 보는 것은 르그리가 마르그리트를 강간할 때다. 자신의 음욕을 채우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한 후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강간한다. 이 과정에 부하의 도움이 있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아내가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이 사건은 보통 일이 아니다. 고소한다고 바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처음 이 사건을 다룰 인물이 피에르 백작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실제 첫 판결은 무죄가 되었고, 카루주는 상고한다.


14세기 재판이라고 대충 하지는 않는다. 원고와 피고의 의견을 듣고, 변호사들이 대동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 이 모든 재판 기록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 자료가 이 책을 쓰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서로 의견이 갈라지는 부분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끼어들고, 진술의 일관성과 그 시대의 상황을 감안했다. 이 부분은 에필로그에 잘 나온다. 르그리의 후손이나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의견이 지닌 허점도 같이 지적하면서. 그리고 이 대결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당시 국왕이 얼마나 이런 대결을 좋아하는지 보여주면서 어떻게 이런 판결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말한다. 그리고 나의 머릿속에서 판타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이 제도를 악용하는 귀족 등의 모습이 떠오른다.


카루주와 로그니는 모두 중기병이다. 완전 무장한 채 거대한 말을 타고 적에게 달려가는 중세의 탱크 같은 존재다. 이 둘의 마상시합처럼 싸우는 장면은 박진감 넘치고, 땅에 떨어져 싸우는 장면은 화려한 대결과 거리가 있다. 죽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행동도 가능하다. 주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자신이 소유한 무기만으로 싸워야 한다. 당연히 좋은 장비와 힘이 중요하지만 경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대결에 대한 예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사대전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작가는 이 대결의 승자를 끝까지 숨긴 채 이야기를 이어가고, 그 시대의 비과학적 인식들을 나오는 상황에 맞춰 하나씩 풀어낸다. 일반 역사 소설처럼 빠르게 읽을 수는 없지만 중세 기사들과 귀족들의 인식과 문화를 아는 데는 많은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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