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카의 여행
헤더 모리스 지음, 김은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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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문신가>의 후속작이란 소개글을 봤다. 그 소설의 주인공이 소련의 굴라크로 가서 겪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역사 상 가장 참혹했던 수용소 두 곳을 연속적으로 경험한 전작의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이 생각의 반은 맞았지만 나머지 반은 전작을 읽지 않은 탓에 잘못되었다. 잘못된 것은 전작의 주인공이 굴라크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소설 속 한 인물이, 독자들이 궁금했던 실카가 간다. 실카는 나치와 잤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고향 대신 굴라크로 보내진다.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녀가 누린 삶이 나치에 대한 협조로 보였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녀의 삶이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는데 전작에서 어떤 역할을 했기에 독자들이 그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졌을지 궁금하다. 전작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소설은 실카가 나치와 잠을 잤다는 것으로 유배형으로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열여섯 소녀가 나치의 폭압적이고 참혹한 힘 앞에 저항하다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 결과다. 그녀가 수용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은 예뻤기 때문이다. 이 특별 대우를 거부하고 다른 유대인처럼 가스실에서 죽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 용기를 내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왜 당신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 않고 살아남았는가 하고. 물론 이것은 잔혹한 반문이다. 생존 욕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녀는 어렸다. 보기에 따라 변명처럼 보일 수도 있는 행동들은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도움이었다. 최소한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부부에게는 그랬다.


굴라크에서 15년을 살아야 하는 그녀는 다시 지옥을 마주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굴라크에서 죽었는지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다. 홀로코스트보다 더 많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수용소에 왔을 때 온 몸의 털을 깎는 행동은 아우슈비츠와 비슷했다. 한 번 경험한 일이나 힘들지 않지만 그녀와 기차를 같이 타고 온 소년 조시에게는 부끄럽고 어려운 일이다. 이 수용소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자 수용자들이 밤이 되면 여자들의 숙소에 침입해 강간한다. 힘이 쎈 남자가 먼저 찍으면 그녀는 건드릴 수 없다. 실카에게는 너무 낯익은 현실이다. 처녀인 조시에게는 너무 낯설다. 하지만 이 강간이 반복될 때 두 여자가 보여준 반응은 다르다. 실카는 강간에 무감각해지고 무반응으로 일관하지만 조시는 그 강간범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굴라크의 생존 환경은 최악이다. 추위와 배고픔은 언제나 있고, 남자들의 강간은 수시로 일어난다. 간수들이 이것을 묵인하기에 가능하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중노동 현장으로 보내진다. 중요한 원료인 석탄을 깨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중에 실카가 간호사가 되고, 구급차를 타게 될 때 그 사고 현장을 마주한다. 최악의 경험을 겪었다고 해서 이런 현장들이 쉬울 리 없다.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그녀 자신이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그녀이지만 다른 사람의 죽음에 눈을 돌릴 정도는 아니다. 이 소설의 상당 부분은 실카가 다른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어떻게 전해주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굴라크를 벗어날 기회가 왔을 때조차 그녀는 이 기회를 친구에게 넘긴다.


그녀가 유대인이고, 아우슈비츠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 같은 막사에 있다. 이 사실을 밝히면 실카는 힘들게 연대를 쌓은 막사 동료들에게 배척받을 수 있다. 이 정보를 쥔 한나는 병원의 약을 요구한다. 약을 주지 않으면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몰래 약을 전달한다. 어쩌면 이 행위가 병원에서 그녀를 도와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막사의 동료들은 그녀의 삶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그녀가 병동에서 먹을 것을 들고 와 나눠 주는 것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살고 싶어 저항하지 않았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고통을 매일 느꼈던 경험이 이런 행동으로 이끌었다.


잔혹하고 참혹한 현장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기 보다 간결하게 풀어내면서 실카가 처한 현실과 그 순간을 감정을 표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어렵고 힘든 환경이지만 뛰어난 학습능력과 공감능력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나게 한다. 그녀의 선의가 항상 바르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향을 바르게 간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한 남자는 강간으로 메말랐던 감정에 작은 싹을 틔운다. 이 소설은 거대한 참혹함과 비극 속에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혼자 살아남기보다 같이 살아가기를 선택한 그녀의 삶은 통속적으로 다가올 정도다. 쉽지 않은 선택들이다. 용기와 굳센 의지와 행동력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아우슈비츠와 다른 지옥 속에서 그녀는 선의를 만나고, 그 선의를 바탕으로 희망을 씨앗을 뿌리고, 작은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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